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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도서] 다다다 - 김영하 인사이트 3부작 
김영하 (지은이) | 복복서가 | 2021년 2월
33,000원
양장본 640쪽
국내도서 > 에세이 > 명사에세이 > 문인에세이

 

어쩌다 보니 제 마음속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김영하는 '소설보다 산문을 더 즐겨읽는 작가'로 자리잡았는데요, 소설 작품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호불호가 강해서 1/3도 못 읽었습니다만 산문집, 특히 여행에 관한 수필집이 나오면 반색을 하며 즐겨봅니다. 그러고 보면 나온지 딱 1년이 되었는데 좀 늦긴 했네요;

 

이 산문집은 기존의 '보다'와 '읽다' 그리고 '말하다'를 엮어서 다시 편집한 책입니다. 이 책 서문에서 김영하는 이 세 행위이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통해 타인의 생각을 흡수하여 소화한 사람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전과는 다른 방식과 내용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내가 말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말한다. 그리하여 대화라는 게 시작되는데, 이런 섞임을 통해 우리의 생각은 더 다듬어지고 풍성해진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시야가 좁다는 것을 깨닫고 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책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보다'는 '말하다'와 '읽다'로 이어지고, 그 셋은 순환하면서 인간을 더욱 강한 존재, 세상의 조류와 대중의 광기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정말 깔끔하고 명쾌한 정리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만 실제 구성 안에서는 각종 매체와 사회 현상에 나타나는 함의를 보는 '보다'와 읽는 행위에 대해 말하는 '읽다'의 글 사이의 촘촘한 유기성에 비해 다른 사람과 자신의 작법에 대해 말하는 '말하다'를 끝까지 읽을 동력은 좀 떨어집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제가 '보기'와 '읽기'에는 능해도 '쓰기'에는 그렇게 밀도가 높지 않은 일개 독자여서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같은 '말하다' 내에서도 다른 사람의 쓰기와 자신의 쓰기, 그리고 쓰기를 일반론적으로 말할 때는 집중도가 높았지만 자신의 특정 작품의 작법에 대해서 대답할 때는 뭐 읽은 게 그다지 없으니께 그런 거 같기도 하구요...결정적으로 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김영하를 더 좋아합니다. 특히 '덕후로서 영업할 때 김영하'를 제일 좋아합니다.

 

뭔 소리냐면, 이 사람은 독서와 쓰기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읽으면 이래서 좋아요, 써 봐요, 겁내지 말고, 하면서 영업을 합니다. 좋아하는 것을 필력까지 갖춰가며 즐겁게 영업하는 자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특히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들어가며 썰을 풀 때 그 흡입력과 전율은 굉장합니다. 그리고 반면 교사로 생각해서 한 번 읽고 나서 껄쩍지근하게 외면했던 '보바리 부인'(뭐랄까... 독서광 여자가 로맨스 환상에 빠져서 현실에 처참히 배반당하고 망하는 얘기는, 독서광 여자로서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얘기니까요)을 묘사 하나하나를 다시 씹고 맛보고 즐겨보고 싶어졌습니다.

 

그에 비해서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대담 식으로 설명할 때는, 이 사람의 생래적인 본성대로 꽤 건조하고 객관적이며 비관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사람 표현대로 하자면, 이미 끝내서 출판된 소설은 '건조한 배를 항구에 물을 들여서 바다로 보낸' 마음 상태라서 그런가 보아요. 

 

몇 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인용하고 이만 끝낼까 합니다.

- 이제 가난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기 시간을 헌납하면서 돈까지 낸다. 비싼 스마트폰 값과 사용료, 구독료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부자들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시간과 데이터, 돈을 거둬들인다. 어떻게? 애플과 구글, 아마존 같은 글로벌 IT 기업의 주식을 사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부자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에게 직접 시간 쿠폰을 살 필요는 없다. 그들은 클릭 한 번으로 얼굴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들의 시간을 헐값에 사들일 수 있다. 마르셀 에메의 어두운 버전이 이렇게 구현되었다.

- 베르그루엔의 경우에서 보듯이 현실의 억만장자들은 소유로부터 탈출하고 있다. 그들은 '무소유'가 가장 영리하게 부를 소비하고 현시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이런 방법은 심지어 쿨해 보이기까지 하다...부자들은 이제 빈자들의 마지막 위안까지 탐내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선택의 여지없이 닥치고 받아들여야하는 상태가 누군가에게는 선택 가능한 쿨한 옵션일 뿐인 세계, 세상의 불평등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이들은 종교적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그 후예들은 원주민의 땅을 차지할 자유를 찾아 총을 들고 서부로 향했다. 자유가 이렇게 힘의 논리를 포장하는 명분에 불과한 사회에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세계관이 진리가 된다. 초강대국 미국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가치가 '자유'라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시점에서 현재의 파국을 상상해 보는 것은 지금의 삶을 더 각별하게 만든다. 그게 바로 카르페 디엠이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은 그렇게 결합돼 있다.

-<변호인>은 이런 난감한 상황에 도달하기 전, 도덕적 아버지의 탄생이라는 근사한 장면에서 멈춘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버지는 유능한 아버지가 도덕적인 아버지라는 단계를 경유하지 않고 바로 친밀한 아버지로 변모한다는 이야기다...<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의 아버지는 유능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친밀하지도 않다. 게다가 그는 아예 가족의 경계 밖으로 추방되어 있는 상태다...다양한 형태에서의 결합에서 탄생한 구성원들이 닥쳐오는 갖가지 윤리적 딜레마를 힘겹게 풀어가면서 살아가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속 가족의 모습이 아마 우리가 미구에 경험하게 될 가족상과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다. 나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이다. 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면서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된다.

-현대의 기업들은 우리를 소비자라 부른다. 구글 같은 기업은 우리를 빅데이터의 한 점으로 본다. 정당은 우리를 유권자로 여긴다. 우리의 개성은 몰각되고 행위만이 의미 있다. 우리가 더 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 인터넷에도 접속하지 않으며,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다. 바로 우리 안에 나만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윤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잘 느끼자. 감성 근육을 키우자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들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자. 이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 한국 TV 드라마가 '아시아를 평정'한 것은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이상하게 만들어서라고 생각합니다....그러니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한류를 지속시키기 원한다면 더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이상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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