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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재작년에 CFA 3차에 합격하고 합격기를 블로그에 남겼습니다.

kiel97.tistory.com/entry/CFA-level-3-%EC%B5%9C%EC%A2%85%ED%95%A9%EA%B2%A9%EA%B8%B0-%EC%96%B4%EC%9A%B0-%EB%82%B4%EA%B0%80-%EC%83%9D%EA%B0%81%ED%95%B4%EB%8F%84-%EC%AB%8C-%EA%B7%B8%EB%9E%98?category=761280

 

CFA level 3 최종합격기-어우 내가 생각해도 쫌 그래

기억을 더듬어보면 CFA시험과 제 악연은 2009년,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8년에 AICPA를 따고(여기 좀 어폐가 있는게 전 지금 이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주로 개업 못합니다. AI실무 경력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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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저따위인 것은 갱상도 방언으로 '디비쪼다'의 요건에 딱 맞는 합격기의 서사였기 때문입니다. 굳이 자격증이 필요한 재직기간도 아니고 언제 다시 재취업을 할지도 모르는 퇴직 이후에 악화된 건강과으로  CFA 3차를 공부했고, 공부하러 가서 전날에 누군가와 너죽고 나살자는 기분으로 일산 을밀대에서 맛없는 수육과 함께 두시까지 소주를 퍼마시고, 그 다음날 시험장에 지각하고, 자포자기해서 개발새발 썼더니 그게 의외로 잘 봐줘서 붙었더라...누가 봐도 '상황에 맞을 때 일을 하지 않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일을 벌이다'라는 '디비쪼다'에 맞는 병맛 수기입니다. 제가 저 수기에서 잘한 것은 제가 합격자 윤리를 어기지 않고 시험의 주요 내용이나 절차를 요령껏 피해가서 쓴 것 밖에 없습니다.

 

근데 그걸 또 검색해서 읽으시더라구요... 지금 통산으로 봐서는 '부산 힐튼호텔 숙박기' 다음으로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A/S차원으로 합격 후 차터를 받아내기까지 절차를 간략히 써 볼까 합니다.

 

그 전에 말씀드릴게요...(읽기 싫으면 중간으로 가십시오) CFA LEVEL 1이나 LEVEL 2를 해서 기쁘신 분들, 그저 그 기쁜 마음을 간직하고 시험은 안 쳐도 되지 않을까요? 제가 CFA를 공부하면서 국내 관련 카페는 리젠도 드물고 등업도 힘들어서 미국 레딧의 CFA 쓰레드를 종종 갔었는데요, 거기 가면 'CFA WIDOW'라는 업계 블랙 유머가 나옵니다. CFA 과부. 남편이 CFA 시험에 레벨 1-2-3까지 매달려서 아름다운 봄이 제일 쪼달리는 시기라 외로운 마음으로 가사와 육아를 하는 아내를 일컫는 말이죠. 아 물론 요즘 CFA 홀애비도 있긴 할겁니다만 시험 성비를 볼 때 그리 많지는 않을 겁니다.

shannonstahle.wordpress.com/2015/05/03/im-a-cfa-widow/

 

I’m a CFA widow

***As I write this I want to give explanations of some things because it’ll make more sense for anyone reading. Sorry if it becomes a bit booo-ring. Loren has been taking a series of 3 tests …

shannonstahle.wordpress.com

CFA_WIDOW의_긍정적_수기.

 

언제나 이렇게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 1차 정도는, 그리고 어쩌면 2차까지는 결혼 전에 성공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CFA LEVEL 3은 한끗차이로 떨어져서 몇년이 걸릴 수도 있고 직장에서는 연차가 약간 올라가서 자원으로 여기저기 투입되고, 결혼을 해서 아이도 하나 둘 있을 연차입니다. 그 때 가정의 달 봄에 아내가 모든 것을 감당하면 당연히 원망이 쌓일 수 있죠.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1. 아내가 CFA라는 시험을 쳐서 남편이 매우 바쁘다고 말하면 주변에서 그 시험을 이해할 수 있는가?

2. CFA를 쳐서 차터홀더가 되었을 때, 나와 가족의 삶은 그 전보다 아내의 수고까지 보람찰 만큼 업그레이드될 것인가?

 

2는 각자의 직장 사정에 따라 다르니 각자 판단하시기 바라고(그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상사와 술자리를 상반기에 자주 갖는 게 출세에 더 나을지도;) 1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금융에서도 자산운용-투자업계를 빼면 CFA를 단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드물며, 그게 뭐길래 희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사람도 드뭅니다. 물론 아름다운 부부 사이에서는 잘 몰라도 남편의 뜻을 알아주고 희생하는 배우자가 있지요. 제 이전이전 직장 동료 중에서는 '남편이 주말에 업계 공부를 집에서 하면 전념하라고 아기를 들쳐업고 하루종일 길바닥을 헤매다 오는 자기 친구 아내' 얘기를 미담이랍시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장가를 못 갔...(역시나 이런 악담은 저처럼 결혼을 못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얘깁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들인 LEVEL 1, 2, 어쩌면 예전 3까지의 고생은 그저 매몰비용으로 여기고 지혜로운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는 붙어놓고 뭔 소리야' 하신다면 저는 과부로 만들 아내가 없짜나여... 아파서 쉬느라 딱히 할 일도 없었구여...

 

그래서 19년 가을에 기쁜 합격 소식을 받게 된 저는 가을에 뜻밖의 취업을 하게 되어 3월까지 열심히 일하고, 약간 한가해진 4월 말부터 뒤늦은 인증 절차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 자신의 자산 운용 및 인접 업계 경력이 4년 이상인지 미만인지 먼저 따져봅시다. 업계가 어디까지인지 헷갈린다면 ethics 및 협회 홈페이지를 다시 읽어보시구요, 4년 미만이면 4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인증 절차를 시작하면 됩니다.

 

보자... 4년 넘었다 치고, 인증은 CFA 협회에서 나온 인증 관련 메일의 링크로 들어가서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http://www.cfainstitute.org/membership 

 

Membership

Become a CFA member with CFA Institute. Receive a CFA membership to connect with charterholders and engage with online resources.

www.cfainstitute.org

 

여기서 네 가지 절차를 하면 됩니다.

1. CFA 관련 업계 경력 기술

2. CFA 차터홀더 또는 상사의 추천서

3. CFA 윤리강령 진술

4. 협회 1년 회비 납부(국제협회+한국협회 다요). 역시 마지막은 돈입니다 네...

 

3은 여러분이 시험 치기 전에 했던 사기친적 있는가 등등 이런저런 진술의 확장판이라서 매우 쉽고, 4번은 국제 신용카드만 있으면 됩니다. 따라서 1과 2가 좀 문제인데, 자신의 지금까지 근무 경력 중 CFA 업계에서 받아들일만 하게+진실되게 진술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저는 진실되지 않게 과장 허위로 기술하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업무 경력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제가 입사하자마자 했던 회계팀의 3년 반 경력 중 지분법이나 연결, 파생상품 회계는 회계사 수습을 떼고 등록하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경력이었습니다만 CFA 업계에서는 단순 회계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정말 쪼렙때 했던 CEO 대상 한 페이지 그룹 재무-손익 분석보고서가 더 쓸모있는 경력이죠. 그리고 그 회사에서 제 마지막 경력이던 급여기획 말인데요... PAYROLL 설계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신 3억불 넘는 퇴직연기금을 운용한 경력은 매우매우 도움이 되더군요.

 

역시나 하면서 뭐 이런 게 도움이 되겠나...하던 건 언젠가는 쓸모가 있더군요. corporate finance 포함해서요...

 

여기까지 하고 다듬는 건 의외로 쉽습니다. 영어 경력기술서보다 훨씬 쉬워요. 그리고 이것만 해 놓으면 2. 보증인(차터홀더 2인 또는 상사+차터홀더 1인)의 보증서 받는 건 그냥 사람만 구하면 됩니다. 대개 사람은 유유상종이라서 CFA 공부하는 인간들 옆에는 이미 붙은 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구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혹 없다면 다니시던 학원에 얘기하시면 됩니다. 사실 차터홀더들도 '내가 얘를 아는데 얘 경력진술서 진짜임' 정도의 영어 진술 정도예요.

그래서 4월 말에 시작된 저의 인증 절차는 2달 가까이 되어서...

이런 크고 아름다운 차터를 국제 우편으로 받고 끝났습니다. 생각보다 큽니다. 사무실에 붙여놓거나 방에 붙여놓도록 합시다. 저는 그냥 동봉한 지관통에 넣어놨습니다.(여담입니다만 국제우편 송장에 우편물의 가치를 1불이라고 적어놔서 빈정상했습니다-_-)

 

혹시라도 유익하셨다면 다행입니다. 그럼 이만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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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더듬어보면 CFA시험과 제 악연은 2009년,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8년에 AICPA를 따고(여기 좀 어폐가 있는게 전 지금 이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주로 개업 못합니다. AI실무 경력이 없거든요. 한국회계사 실무 경력은 인정 안 해주고;) one more 병에 걸려버렸습니다. 뭔가 한 김에 3종 세트 연성하면 좋을 것도 같고; CFA가 이름이 좀 그럴싸해보이길래 08년 겨울에 덜컥 level 1에 사전 등록했습니다. 아마 술김이었을 거예요. 전 술김에 시험 등록 잘 하거든요(...)

다만 2009년에 저는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1주에 100시간 일하는 야근봇이 되어있었고;;; 그나마 level 1 과목이 회계와 재무분석이 근 40퍼센트를 차지하고, 파생상품이나 기타 금융상품론도 무난하고 결정적으로...

...100퍼센트 객관식입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그 객관식요. 그래서 붙긴 했어요.

그리고 2010년과 2011년도 뭔가 또 이상한 데 파견가서 일하느라 바빴고, 2012년에는 마침 시간도 나길래 level 2 패스. 어떤 의미에선 level 2가 3보다 난이도가 더 높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전 2가 더 나은 거 같습니다. 2는 item set(어..스토리를 가진 객관식 뭉텅이라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독해량이 엄청 늘어나죠) 그래도 객관식인 게 어디예요.

2013년에는 여전히 시간은 있었는데요, 미국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사고 대응하느라 보험 영어가 늘었구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디즈니랜드가 있는 그 곳입니다)에서 처음으로 친 level 3 시험은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날아온 결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떨어진 애들 중에서는 상위 10프로 내, 그러니까 당시 말로 하자면 쩌리짱;이었다고 합니다. 뭐 떨어진 건 떨어진 거죠...

그 후에 두 번 부서를 옮기며 신기할 정도로 평행이론을 달리는 상사들과 악연으로 얽히고 퇴사도 하고, 놀다가 맨날 술먹다가,

...술버릇이 또 도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미국 cfa협회에 카드로 650불인가 결제한 문자가 보이더군요. 참고로 미국 애들은 시험 수수료에 환장한 애들이라 환불/취소는 없습니다.

망했다... 650불이면 어디 가까운 외국에 놀러갈 돈인데 뭐 이런 데다...

일단 현실을 부정하면서 놀다가 시험 넉달 전인 2월 하순부터 커리큘럼 북을 아이패드에서 다운받았습니다. 시험 공식 교재인 커리큘럼북은 굉장히 빽빽한 폰트에 3천페이지 육박하는 거 같습니다. 솔직히 양에 질려서 페이지 세어본 적도 없어요. 대신에 슈웨이저 북이라고 이걸 또 대충 1500-1800페이지 내로 좀 널널하게 구입한 걸 사서 봤습니다. 커리큘럼 북의 그해 업데이트된 내용을 제외하자면, 슈웨이저 요약본을 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일단 영어가 굉장히 심플해서 ESL인 사람들한테 가독성이 훨씬 나아요. 커리북은 영어가 너무 현학적이라 좀 재수없;;;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 시험은 2차가 더 낳;냐 3차가 더 어렵냐 가지고 병림픽이 가끔 있습니다...만, 한국인들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세계 3차 합격률이 50프로 내외인데, 한국은 20프로선이란 비공식 통계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오전 에세이 시간
-한국 금융가의 쥐어짜는 근무 환경

...정도가 3차 통곡의 벽의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는 3차는 영문 에세이가 100프로였다고 하는데, 오전 3시간, 비중이 50프로로 떨어진 지금도 만만찮습니다. 오전에 배점이 총 180점인데 이게 과목으로 쪼개서 11-12개의 대문제예요. 이게 또 대문제 안에서 다시 잘게 쪼개서 환경분석이 근 1페이지의 장광설로 펼쳐집니다. 공통 배경 내에서 2-4점 배점의 소문제로 쪼개지고 한 소문제가 뭔 애널리스트의 개소리;를 영어로 읽고 찬반 결정하고 논박하고 계산을 영어로 해야 하는 문제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저는 대학교까지 딱히 영어 에세이를 쓰는 세대가 아니어서(절므니들은 좀 더 능숙하더군요) 에세이가 좀 짜증났습니다. 이패스코리아의 합격자 무료 강의를 줏어들으니 10년치 에세이 기출을 반복해서 풀라고 하더라구요. 단, 공개 모범 답안은 너무 기니까 줄여서 쓸 수 있도록.

딱히 뭐 다른 자료도 없으니까 2018년부터 역순으로 풀었습니다. 대략 7-8년치 한번씩 푼 거 같네요. 08-10년은 시간도 없고, 예전이라 큰 의미 없어서 안 봤습니다.

공교롭게도 책을 잡은 2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가 제 건강의 암흑기였습니다. 불면증에 종양까지 아주 화려하게 도져서 의자에 앉아있기도 힘들었거든요. 하루에 몇 시간 누워서 책 좀 읽다가, 던져 놓다가, 병원 갔다가 이건 뭐 공부하는 시체의 삶;;;

그래도 회사 다닐 시절보다는 시간 확보가 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시험에 3차까지 올라온 양반들이면 시험 특성상 학생은 안 되고 업계 경력자들인데, 시험 끝물인 2분기에 신나게 쥐어짜이거든요. 만국 공통으로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혹사당하긴 합니다만, 한국은 여러 모로 좀 심하죠. 근데 3차는 얘기했다시피 순발력있는 암기가 아니라 에세이 등등 해서 펜대 잡는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형 금융기관에서는 5-6월은 망했어요;

과목별로 방법론 얘기하는 건 의미도 없으니 패스. 근데 마지막 판이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각각 테마가 어떤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큰 그림 보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디테일을 안 보는 것도 아닌게, 설마 이것까지 나오겠냐고 생각해서 막판에 머리에서 튀어나간 모 테마 세무 문제가 꽤 높은 배점의 계산으로 나왔고, 회계사가 세무 공식이 기억 안 난다고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다가 멘탈이 거지가 되고 아 고통스러워;;;

계획표 세우는 건 중요한데요, 어차피 못 지킵니다. 저도 맨날 아파서 굴러다니느라 처음 계획의 반도 못 한 듯 해요. 거기에 실망하지 말고 그냥 뭐라도 계속 하는 게 좋습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6월 15일 시험 당일에 근접했고, 시험 장소 킨텍스에 근접한 숙소(이 숙소는 따로 할 말이 좀 있습니다)를 예약하고 상경했습니다. 어찌나 성의없는지 전날에 상경해서야 아 수험표가 있었지; 하고 어찌저찌해서 인쇄했고...

전날에 누군가와 만나서 을밀대 일산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타당한 사유가 점점 생겨나서; 술을 엄청나게 마셔대다가...

핸드폰 로그를 보니 밤 두시에 숙소에 들어갔었던 거 같더군요; 뭐 기억도 잘 안 나기는 하는데 을밀대 일산점은 을밀대 전 지점이 그러하듯이 친절하지도 않으며, 지점 종특으로 수육이 양이 적고 맛이 없어서 안주로 쓸모가 없습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킨텍스로 갔는데, 역시나 성의가 없어서222 장소도 체크를 제대로 안 했었는데 09년과 12년 가락대로 1전시장에 갔더니 무슨 국제 박람회를 하고 있고, 시험장은 2전시장입니다.

킨텍스 1전시장과 2전시장을 왕복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도보가 아니라 골프 카트 같습니다; 진짜 멀어요... 그 먼 길을 헤치고 2전시장에 갔더니 이미 시험 입장 시한(시험 시작 30분전)이 경과되어 밖에서 대기하라더군요. 커피 한잔 마시며 정신차리고 대기하다가 안내와 신원 확인 후 들어가서 앉으니 이미 시험 시작한지 20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이왕 이 시험을 결제한 것도 병신이고 치러 온 것도 병신이고 전날에 술 먹고 진상부리다 늦은 것도 병신이니 근성있는 병신이 되자 싶어서 끝까지 앉아서 풀었습니다. 어차피 오래 쓸 시간도 기력도 없어서 한 문제별로 핵심단어 중심 1-3문장씩 썼구요, 계산문제에선 공식도 빼먹을 때가 많았고 notation도 다 생략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문제의 세무 6점 빼고 다 채웠네요.

기빨리는 오전 세 시간이 지나갔고, 점심시간입니다. 회사 옛 후배를 만나 아직도 이런 거 보냐고 서로 갈구다가, 밥도 먹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여담인데, CFA는 문과에서 보기 드문 남초, 그것도 아재 시험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옆머리도 희끗희끗하고 가끔 윗머리도 훤하니 비고...물론 그들에게도 긴 머리 풀어헤치고 트로피컬 무늬의 블라우스에 핫 팬츠를 입은 중년 여자가 이상해 보였던 거 같습니다(..)

Item set(세트형 확장 객관식) 60문제였던 오후는 좀 더 이상했습니다. 물론 오전에도 에세이로는 안 나왔던 게 대문제로 나와서 당황시키긴 했는데, 오후는 파격이 더 심했습니다. 보통은 6문제가 한 세트로 해서 나오는데 그 공식이 다 깨지더라구요. 아니 풀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구성의 흐름이 다 깨지고 촘촘하게 재구성해버립니다. 계산문제는 한번두번 다 꼬아놓고. 덕분에 숙취 김에 대충 계산했던 걸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함정이 곳곳에 있어서 다섯문제인가 답을 고쳤습니다. 한국인이 믿을 게 오후 세션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아닌 거 같아요. 한국 중국 응시자가 많아져서 응시 시간대도 바꿔버리더니 패턴도 동양인들이 오래오래 프로그램 안에 머물게...;;;

그렇게 채워넣다 보니 오후 세 시간도 다 지나갔고, 시험이 끝났습니다. 마침 시험장 내에 쓰레기통이 있길래 슈웨이져책을 다 버리고 왔습니다. 무거웠거든요.

...실직자 주제에 팔아서 생계에 보탤 생각은 안 하고, 아직 정신을 덜 차렸어요;

고향 내려와서 두달쯤 놀다가 8월 20일에 문제의 미국 협회에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축하한댑니다. 합격자 대략 중간쯤 한 모양입니다. 에세이도 객관식도 대략 중간입니다.

사실 이 후기를 쓰게 된 것도 에세이 결과에 저도 좀 놀라서요; 알고 보면 채점관들 취향이 개발새발...아니 bold한 거였나봐요.

시험은 붙었고 솔직히 기분은 좋습니다. 제게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결핍되고 있지만 아직 지력은 남아있다 싶어서요, 아직은요. 쓸모는 AICPA보다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KICPA된 20대 중반부터 구 회사 안이든, 밖이든 한국 안에서 제 정체성은 한국 회계사거든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자랑할 길도 없고 ㅎ 어차피 건강 문제 때문에 당분간 이걸 구직에서 쓸 일도 요원할 거 같아요.

다만 머리에 재밌는 거 몇 개 집어넣기도 했고... 재능 낭비도 최고의 사치가 아닐까요 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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