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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 가을부터 재택 근무가 가능하고 진입/퇴출 비용이 최저라는 영업에 혹해서 산업 번역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어떤 단계냐면...후...뭐 아직은 진입 비용 손익 분기 넘기고 용돈 벌고 있는 수준이라고 해 둡시다.
그 진입 비용 중에는 SDL사에서 내놓은 번역 소프트웨어 트라도스 스튜디오(앞으로는 트라도스라고 통칭합니다) 구입 비용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업계 1위에 갑님들이 선호하시는 것이라 이걸 안 사면 안 되겠더라구요. 이걸 사면 LEVEL 1-Getting started에 무료로 세 번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있습니다. (실은 SDL사를 인수한 RWS에 제가 머슴...아니 벤더가 되어서 세 번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추가로 하나 더 있습니다) 붙으면요?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고 전문 사이트 프로필에 링크를 붙여서 자신이 업계 1위 소프트웨어에 초급 수준의 운용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갑님들에게 어필할 수 있습니다. 번역 능력은 훌륭하면서 툴 능력은 떨어지는 분들에 비해서 비교 우위는 가질 수 있겠어요.

저는 작년 가을에 이 소프트웨어를 구매했을 때부터 흐린 눈으로 애써 외면하면서 LEVEL 1 응시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뭘 하든 시험을 치고 싶어한다는 자칭 타칭 평가에 대해 쫌 반성을 하고 있었거든요. 세상에 시험으로 해결되지 않는 게 많다는 것은 저도 잘 알잖습니까. 차라리 그 시간에 번역 연습을 하는 게 낫지요. 하지만 사람은 심란하고 멘탈이 거지가 될 때가 있지요. 그런 때였습니다. 날씨는 찹찹하고 전날 토막잠을 자서 피곤하고 일거리는 별로 안 들어오고 책도 눈에 안 들어오는데 맥주 한 캔을 들이키고 두 번째 캔은 그만 쳐먹어야겠다 싶은 그런 날...
RWS사 홈페이지에 로그인해서 시험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저는 이 시험을 대충 운전면허 필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RWS사 홈페이지에서는 초급 치려는 사람에게 트라도스 영어 교재 PDF본 두 권-대충 합쳐서 200페이지 좀 넘는 걸 제공합니다. 근데 제국주의자들의 술책인지 디폴트 번역 설명이 '영어-독일어'인데다가 저는 한글 메뉴에 익숙해져 있는데 뭔가 미묘하게 다르고 잘 매치되지 않는 것도(메이저 언어 쌍에서는 가능한 기능이 한국판에서는 안 되는 것도 몇 개 있습니다) 있어서 교재는 정말 한 시간만에 대충 읽고 시험 창을 열었어요.

시험은 영어로 제공되고, 4지 선다형입니다. 열 문제를 10분 안에 풀어야 하고, 10분이 지나면 창은 자동으로 닫히고 다음 창이 열려서 10문제씩 풀게 합니다. 그렇게 네 세션 도합 40분 동안 40개의 문제를 풀고, 30개 이상 맞히면(75점이네요) LEVEL 1 합격 인증을 받습니다. 참 쉽죠?

...50점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시험은 '착하게 살자'라는 마음가짐만으로는 안 되는 시험이었습니다. 간만에 떨어진 거라 더 우울해져서 러시아인의 우울까지 떨어지려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내가 마음가짐을 잘못 잡았어.

제 컨설턴트님께서 지극히 우려하는 무리들처럼 저는 트라도스를 메모장처럼 사용하는 상태에서 그리 멀지가 않더라구요. 매뉴얼을 꼼꼼하게 읽어서 스스로 각종 기능들을 직접 해 볼 수 있는 단계까지 가야 붙을 수 있는 시험이었어요. 이건 오픈 북이라고 해도 책대로 나오는 문항 수가 적어서 이해를 해야 하더라구요. 거기다 정직하게 책 그대로 출제된다 치더라도 ctrl+f로 찾는 데 시간 걸리는 것만 냄;;;

그래서 저는 트라도스 실습도 해 보면서 평소에 잘 안 쓰던 이런저런 기능도 익히고 매뉴얼을 끝까지 정독한 다음...

80점으로 붙었습니다. 다시 기고만장해지더군요. 잘 들어주는 고마운 지인한테 자랑을 했더니 그냥 시험 쳐 주는 걸로 업을 삼아보면 어떻겠냐고 ㅋㅋㅋ 아뇨 대리시험은 위법입니다 ㅋㅋㅋ

그나저나 별 필요도 없는 level 2나 3 치겠다고 염병천병 떨어대진 않...겠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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