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기억을 더듬어보면 CFA시험과 제 악연은 2009년,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8년에 AICPA를 따고(여기 좀 어폐가 있는게 전 지금 이 상태에서 캘리포니아주로 개업 못합니다. AI실무 경력이 없거든요. 한국회계사 실무 경력은 인정 안 해주고;) one more 병에 걸려버렸습니다. 뭔가 한 김에 3종 세트 연성하면 좋을 것도 같고; CFA가 이름이 좀 그럴싸해보이길래 08년 겨울에 덜컥 level 1에 사전 등록했습니다. 아마 술김이었을 거예요. 전 술김에 시험 등록 잘 하거든요(...)

다만 2009년에 저는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1주에 100시간 일하는 야근봇이 되어있었고;;; 그나마 level 1 과목이 회계와 재무분석이 근 40퍼센트를 차지하고, 파생상품이나 기타 금융상품론도 무난하고 결정적으로...

...100퍼센트 객관식입니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그 객관식요. 그래서 붙긴 했어요.

그리고 2010년과 2011년도 뭔가 또 이상한 데 파견가서 일하느라 바빴고, 2012년에는 마침 시간도 나길래 level 2 패스. 어떤 의미에선 level 2가 3보다 난이도가 더 높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전 2가 더 나은 거 같습니다. 2는 item set(어..스토리를 가진 객관식 뭉텅이라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독해량이 엄청 늘어나죠) 그래도 객관식인 게 어디예요.

2013년에는 여전히 시간은 있었는데요, 미국에서 대형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사고 대응하느라 보험 영어가 늘었구요,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디즈니랜드가 있는 그 곳입니다)에서 처음으로 친 level 3 시험은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날아온 결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떨어진 애들 중에서는 상위 10프로 내, 그러니까 당시 말로 하자면 쩌리짱;이었다고 합니다. 뭐 떨어진 건 떨어진 거죠...

그 후에 두 번 부서를 옮기며 신기할 정도로 평행이론을 달리는 상사들과 악연으로 얽히고 퇴사도 하고, 놀다가 맨날 술먹다가,

...술버릇이 또 도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미국 cfa협회에 카드로 650불인가 결제한 문자가 보이더군요. 참고로 미국 애들은 시험 수수료에 환장한 애들이라 환불/취소는 없습니다.

망했다... 650불이면 어디 가까운 외국에 놀러갈 돈인데 뭐 이런 데다...

일단 현실을 부정하면서 놀다가 시험 넉달 전인 2월 하순부터 커리큘럼 북을 아이패드에서 다운받았습니다. 시험 공식 교재인 커리큘럼북은 굉장히 빽빽한 폰트에 3천페이지 육박하는 거 같습니다. 솔직히 양에 질려서 페이지 세어본 적도 없어요. 대신에 슈웨이저 북이라고 이걸 또 대충 1500-1800페이지 내로 좀 널널하게 구입한 걸 사서 봤습니다. 커리큘럼 북의 그해 업데이트된 내용을 제외하자면, 슈웨이저 요약본을 보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일단 영어가 굉장히 심플해서 ESL인 사람들한테 가독성이 훨씬 나아요. 커리북은 영어가 너무 현학적이라 좀 재수없;;;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이 시험은 2차가 더 낳;냐 3차가 더 어렵냐 가지고 병림픽이 가끔 있습니다...만, 한국인들에게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전세계 3차 합격률이 50프로 내외인데, 한국은 20프로선이란 비공식 통계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오전 에세이 시간
-한국 금융가의 쥐어짜는 근무 환경

...정도가 3차 통곡의 벽의 원인이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는 3차는 영문 에세이가 100프로였다고 하는데, 오전 3시간, 비중이 50프로로 떨어진 지금도 만만찮습니다. 오전에 배점이 총 180점인데 이게 과목으로 쪼개서 11-12개의 대문제예요. 이게 또 대문제 안에서 다시 잘게 쪼개서 환경분석이 근 1페이지의 장광설로 펼쳐집니다. 공통 배경 내에서 2-4점 배점의 소문제로 쪼개지고 한 소문제가 뭔 애널리스트의 개소리;를 영어로 읽고 찬반 결정하고 논박하고 계산을 영어로 해야 하는 문제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저는 대학교까지 딱히 영어 에세이를 쓰는 세대가 아니어서(절므니들은 좀 더 능숙하더군요) 에세이가 좀 짜증났습니다. 이패스코리아의 합격자 무료 강의를 줏어들으니 10년치 에세이 기출을 반복해서 풀라고 하더라구요. 단, 공개 모범 답안은 너무 기니까 줄여서 쓸 수 있도록.

딱히 뭐 다른 자료도 없으니까 2018년부터 역순으로 풀었습니다. 대략 7-8년치 한번씩 푼 거 같네요. 08-10년은 시간도 없고, 예전이라 큰 의미 없어서 안 봤습니다.

공교롭게도 책을 잡은 2월 말부터 6월 중순까지가 제 건강의 암흑기였습니다. 불면증에 종양까지 아주 화려하게 도져서 의자에 앉아있기도 힘들었거든요. 하루에 몇 시간 누워서 책 좀 읽다가, 던져 놓다가, 병원 갔다가 이건 뭐 공부하는 시체의 삶;;;

그래도 회사 다닐 시절보다는 시간 확보가 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시험에 3차까지 올라온 양반들이면 시험 특성상 학생은 안 되고 업계 경력자들인데, 시험 끝물인 2분기에 신나게 쥐어짜이거든요. 만국 공통으로 금융업계 종사자들은 혹사당하긴 합니다만, 한국은 여러 모로 좀 심하죠. 근데 3차는 얘기했다시피 순발력있는 암기가 아니라 에세이 등등 해서 펜대 잡는 시간이 필요한데, 한국형 금융기관에서는 5-6월은 망했어요;

과목별로 방법론 얘기하는 건 의미도 없으니 패스. 근데 마지막 판이다 보니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각각 테마가 어떤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큰 그림 보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디테일을 안 보는 것도 아닌게, 설마 이것까지 나오겠냐고 생각해서 막판에 머리에서 튀어나간 모 테마 세무 문제가 꽤 높은 배점의 계산으로 나왔고, 회계사가 세무 공식이 기억 안 난다고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끼다가 멘탈이 거지가 되고 아 고통스러워;;;

계획표 세우는 건 중요한데요, 어차피 못 지킵니다. 저도 맨날 아파서 굴러다니느라 처음 계획의 반도 못 한 듯 해요. 거기에 실망하지 말고 그냥 뭐라도 계속 하는 게 좋습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6월 15일 시험 당일에 근접했고, 시험 장소 킨텍스에 근접한 숙소(이 숙소는 따로 할 말이 좀 있습니다)를 예약하고 상경했습니다. 어찌나 성의없는지 전날에 상경해서야 아 수험표가 있었지; 하고 어찌저찌해서 인쇄했고...

전날에 누군가와 만나서 을밀대 일산점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타당한 사유가 점점 생겨나서; 술을 엄청나게 마셔대다가...

핸드폰 로그를 보니 밤 두시에 숙소에 들어갔었던 거 같더군요; 뭐 기억도 잘 안 나기는 하는데 을밀대 일산점은 을밀대 전 지점이 그러하듯이 친절하지도 않으며, 지점 종특으로 수육이 양이 적고 맛이 없어서 안주로 쓸모가 없습니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킨텍스로 갔는데, 역시나 성의가 없어서222 장소도 체크를 제대로 안 했었는데 09년과 12년 가락대로 1전시장에 갔더니 무슨 국제 박람회를 하고 있고, 시험장은 2전시장입니다.

킨텍스 1전시장과 2전시장을 왕복하기 제일 좋은 방법은 도보가 아니라 골프 카트 같습니다; 진짜 멀어요... 그 먼 길을 헤치고 2전시장에 갔더니 이미 시험 입장 시한(시험 시작 30분전)이 경과되어 밖에서 대기하라더군요. 커피 한잔 마시며 정신차리고 대기하다가 안내와 신원 확인 후 들어가서 앉으니 이미 시험 시작한지 20분이 지나가 있었습니다.

...이왕 이 시험을 결제한 것도 병신이고 치러 온 것도 병신이고 전날에 술 먹고 진상부리다 늦은 것도 병신이니 근성있는 병신이 되자 싶어서 끝까지 앉아서 풀었습니다. 어차피 오래 쓸 시간도 기력도 없어서 한 문제별로 핵심단어 중심 1-3문장씩 썼구요, 계산문제에선 공식도 빼먹을 때가 많았고 notation도 다 생략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문제의 세무 6점 빼고 다 채웠네요.

기빨리는 오전 세 시간이 지나갔고, 점심시간입니다. 회사 옛 후배를 만나 아직도 이런 거 보냐고 서로 갈구다가, 밥도 먹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여담인데, CFA는 문과에서 보기 드문 남초, 그것도 아재 시험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옆머리도 희끗희끗하고 가끔 윗머리도 훤하니 비고...물론 그들에게도 긴 머리 풀어헤치고 트로피컬 무늬의 블라우스에 핫 팬츠를 입은 중년 여자가 이상해 보였던 거 같습니다(..)

Item set(세트형 확장 객관식) 60문제였던 오후는 좀 더 이상했습니다. 물론 오전에도 에세이로는 안 나왔던 게 대문제로 나와서 당황시키긴 했는데, 오후는 파격이 더 심했습니다. 보통은 6문제가 한 세트로 해서 나오는데 그 공식이 다 깨지더라구요. 아니 풀면 그만 아닌가 하지만 구성의 흐름이 다 깨지고 촘촘하게 재구성해버립니다. 계산문제는 한번두번 다 꼬아놓고. 덕분에 숙취 김에 대충 계산했던 걸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함정이 곳곳에 있어서 다섯문제인가 답을 고쳤습니다. 한국인이 믿을 게 오후 세션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아닌 거 같아요. 한국 중국 응시자가 많아져서 응시 시간대도 바꿔버리더니 패턴도 동양인들이 오래오래 프로그램 안에 머물게...;;;

그렇게 채워넣다 보니 오후 세 시간도 다 지나갔고, 시험이 끝났습니다. 마침 시험장 내에 쓰레기통이 있길래 슈웨이져책을 다 버리고 왔습니다. 무거웠거든요.

...실직자 주제에 팔아서 생계에 보탤 생각은 안 하고, 아직 정신을 덜 차렸어요;

고향 내려와서 두달쯤 놀다가 8월 20일에 문제의 미국 협회에서 메일을 받았습니다. 축하한댑니다. 합격자 대략 중간쯤 한 모양입니다. 에세이도 객관식도 대략 중간입니다.

사실 이 후기를 쓰게 된 것도 에세이 결과에 저도 좀 놀라서요; 알고 보면 채점관들 취향이 개발새발...아니 bold한 거였나봐요.

시험은 붙었고 솔직히 기분은 좋습니다. 제게 많은 것이 빠져나가고 결핍되고 있지만 아직 지력은 남아있다 싶어서요, 아직은요. 쓸모는 AICPA보다 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KICPA된 20대 중반부터 구 회사 안이든, 밖이든 한국 안에서 제 정체성은 한국 회계사거든요.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는 뭐라 설명할 길이 없어서 자랑할 길도 없고 ㅎ 어차피 건강 문제 때문에 당분간 이걸 구직에서 쓸 일도 요원할 거 같아요.

다만 머리에 재밌는 거 몇 개 집어넣기도 했고... 재능 낭비도 최고의 사치가 아닐까요 ㅋ

-끝-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