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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안예은의 여름 호러 쏭 '창귀'는 8월 1일에 나왔고 저는 소문만 대충 듣다가 8월 5일에 처음 들었습니다. 처음엔 어 졸라 무서워; 하고 그냥 딴 거 했는데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재생이 되고 한 번 듣고 넘어갈 거 두 번 듣고 세 번 듣다가 머릿속에 창귀가 씌인 건지 예수쟁이가 나무~아미~타~불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중얼중얼거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호랭이가 멸종하길 다행이에요... 안 그러면 씌여서 잡아먹힐 뻔 ;ㅁ;

https://youtu.be/8UUDyQyuvwI

게 누구인가 가까이 와보시게
옳지 조금만 더 그래 얼씨구 좋다
겁 없이 밤길을 거니는 나그네여
내 말 좀 들어보오
나뭇잎 동동 띄운 물 한 잔 마시며
잠시 쉬어 가오
나무아미타불 신령님이
보우하사 나무아미타불 신령님이
나는 올해로 스물하나가 된 청년인데
범을 잡는다 거드럭대다가 목숨을 잃었소만
이대로는 달상하여 황천을 건널 수 없어
옳다구나 당신이 나를 도와주시게
얼씨구 좋다 어절씨구 좋다 그대
나와 함께 어깨춤을 덩실 더덩실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이 밤
산신의 이빨 아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무꾸리를 해보자 네 목숨이 곤히 붙어있을지
무꾸리를 해보자 미천한 명줄이
언제고 이어질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 사이에는 웅신님이
연못 바닥에는 수살귀에 (아수라발발타)
벽공너머에는 불사조가
나그네 뒤에는 도깨비가 (아수라발발타)
교교하다 휘영청 만월이로세 얼쑤
수군대는 영산에 호랑이님 행차하옵신다
얼씨구 좋다 어절씨구 좋다 그래
어디 한 번 어깨춤을 덩실 더덩실
하찮은 네 놈 재주를 보자꾸나
이곳이 너의 무덤이로다
얼씨구 좋다 어절씨구 좋다 우리
모두 함께 어깨춤을 덩실 더덩실
(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절씨구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혼령이 되어 또 왔네)
눈을 뜨면 사라질 곡두여 이 밤
산군의 길 위에서
너를 데려가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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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는 위와 같습니다...존무 ㄷㄷㄷ

'창귀'라는 게 한국 전통 귀신, 귀신 중에서도 악귀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창귀로 호랑이의 노예-수발놈-_-이 되어 길 안내, 식사 시중 등 각종 수발을 들다가 자신과 같은 신세로 산사람을 잡아먹히게 해야 겨우 풀려나서 저승으로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귀 신세를 면하려고 가족 친척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가서 잡아먹히게 하려고 갖은 수를 다 쓰기 때문에 창귀가 밤에 부르고 꼬이면 들은 척도 하지 말라-는 게 구전설화인데요, 그냥 밤에는 험한 데 나다니지 말고 얌전히 있을 것이며 지인이 호환을 당했다고 구하려고 따라가거나 복수한다고 줄초상 치르지 말고 우리라도 목숨을 건지자는 (전) 호랑이의 나라다운 설화라 하겠습니다.

 

이 창귀 쏭은 안예은 본진인 트위터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어서 각종 존잘님들이 창귀를 주제로 한 연성을 쏟아내고 계시니 존잘의 연성이 어떤 것인가를 구경하고 싶으시면 트위터에서 검색해보시길. 전 눈호강 많이 했습니다. 거개가 호러라 제 취향은 아니긴 한데 존잘이란 취향을 뛰어넘는 것이라. 그리고 여러 가지 2차 해석들도 돌아다니고 있는데 개중 흥미있었던 것은 '햇님달님' 설화의 호랑이가 자신이 잡아먹은 오누이의 어미인 척 목소리를 흉내낼 줄 아는 것이 실은 잡아먹은 어미가 생전의 목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잡아먹으라고 인도하는 창귀가 되었다는 거였습니다;ㅁ; 그러나 최고는 역시 본인이 하는 연성이겠죠.

https://www.youtube.com/watch?v=13-YRd7pOM0&t=42s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에 거의 다 들어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을 더 얹고 싶은 것은 화자인 '범을 잡는다고 거드럭대다가 목숨을 잃은 스물하나 청년'이었으나 이제는 악귀화 진행이 다 되어버린 창귀의 선명한 악의와 조롱입니다.

 

창귀는 처음엔 은근하게 추어주며 꼬입니다. 그러다가 문제의 '범을 잡는다고 거드럭대다 목숨을 잃었소만'에서 자분자분하던 목소리는 한과 광기로 폭발합니다(안예은 특유의 확 뒤집어꺾는 매력적인 창법인데 아주 또렷또렷하니 듣기 괜찮아요) 비명횡사했는데 황천길도 못 가고 자신을 죽인 짐승의 시중을 들고 있다니 그 분노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네의 눈앞에 있는 자신이 사람이 아닌 악귀임을 스스로 처음으로 소개하는 부분이죠. 그리고 '옳다구나 당신이 나를 도와주시게'에서 나그네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과 창귀로서의 노예 라이프까지 떠넘길 것임을 밝히고는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제가 앞에 창귀가 분노가 있다고 했죠. 근데 그 분노는 호랑이에 대한 분노는 아닙니다. 호랑이는 자신이 범접하기에는 너무나 큰 존재이죠. 대신 그 분노는 자신이 꼬여낼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진작에 꼬임을 당해서 해방을 시켜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이제야 나타난' 인간-이미 공포로 제정신이 아닐 가련한 청자에게 굴절 분노로 가서 조롱과 악의의 형태로 표현됩니다.(왜 예전에 아라비안 나이트의 에피소드 있잖아요. 갇혀서 자기를 구해주면 세상 다 주겠다고 하다가 점점 대답없는 기다림에 지쳐서 결국 자기를 구해주는 사람은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하는 거 그거 생각나더라구요; 사람...이 경우엔 악귀는 언제나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나 호랭이한테 싱싱한 인간 밥때에 제대로 배달 안시켜준다고 개갈굼을 당하는 처지는...어우;)

 

조롱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전과 후를 갈라쳐서, 전 부분을 다시 되밟아보면 그 의뭉스러움에 소름이 끼칩니다. 나중에 '미천한 명줄'에 '하찮은 네놈'로 후려칠 거면서 앞에선 왜 그렇게 존대해주면서 살살 꼬였는지. 그리고 나그네 모셔가면서 창귀가 '신령님이 보우하사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는 거 있잖아요. 거기서 신령님이 아무래도 산신, 호랑이인 거 같아요. 아무리 해 봤자 여긴 산이고 산신이 보우하사 너는 산신의 밥이 될 것이다 이렇게 들려서 흑흑. 그리고 악의야 뭐... 반전부터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더욱 더 선명해집니다.  재밌는 건 청자를 죽음보다 더 못한 길로 몰아갈 악의가 더 강해질수록 화자의 홀가분함과 기쁨은 더 강해집니다. 이제 해방되어 저승으로 떠날 테니까요. 마지막 '이 밤 산군의 길 위에서 너를 데려가겠노라' 부분은 순수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와도 같습니다.(아니 쫌 애기동자 내림한 무당 목소리 같기도 해;;) 순수한 선과 순수한 악, 기쁨과 악의는 통한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 들은 제 감상: 쟈 황천가도 제정신되기 힘들 것 같은데...그냥 악귀가 이제 체질인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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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경성의 주택지-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포스팅 제목은 어그로입니다 녜;)
- 정암총서 12(건축 역사 시리즈예요)
- 지은이 : 이경아
- 출판사 : 도서출판 집
- 출간일 : 2019년 11월
- 장르 : 건축이론/비평/역사 또는 전통 건축


올해 6월 말일, 저의 최애 서점 기장 힐튼 호텔 1층(아니 B1층이었나 B2층이었나...거긴 층수 개념이 영 헷갈린단 말이죠;;;)에 위치한 'eternal journey'에서 돌아다니다 꽂힌 책입니다. 이 서점의 장점 중 하나는 책 전시인데요, 굳이 최신 서적과 베스트셀러에 집중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취향에 맞춘 책 전시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서점에서 놓쳤던 책을 여기서 발견하는 (지한테나) '숨은 보석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원체 수박겉핥기식으로 아주 라이트하게 건축에 흥미가 있고, 서울과 서울의 역사를 좋아합니다.(이제 서울에 살지도 않는데 왜 좋아하냐고 물으신다면... 멀어졌기에 더욱 완전하게 사랑할수도 있는 법이죠-_- 저의 히치콕 할배가 런던에 살면서 뉴욕의 지도를 완벽하게 외웠던 것처럼요;ㅁ;)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전 일제시대, 효율적인 식민지화를 위한 경성 집중 개발로 인구 수가 1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경성의 밀집도가 심해지고 주택난이 심각해집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업자는 (적당히 총독부 및 경성부윤과 결탁해서) 대규모 필지를 사들여서 민간에 분양합니다. 당시 주택은 관사, 사택, 문화주택, 한옥주택, 아파트, 영단주택, 부영주택 등으로 계층과 직업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고 점점 더 개발될 수록 경성은 4대문을 벗어나 저 멀리 안암과 흑석동까지 확장됩니다. 개발업자들이 매력적인 브랜드 네이밍을 해 신문 잡지에 광고하고 분양 팸플릿을 배포하고 기자 설명회 등을 열어 이상향으로 선전하는 건 현대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리고 모델하우스와 박람회, 현실로 이뤄진 완벽한 주택단지 이면에는 일방적인 철거로 쫓겨나가서 인근 산에 빈민촌을 짓고 극단의 대비를 이루는 원주민들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죠. 일제 막판-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에는 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재개발을 수행했습니다. 일본 내지에서야 주택재개발조합 눈치도 봐야 되고 챙겨야 될 인권도 있지만 식민지에선 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심시티하기엔 최고의 조건이었고 일본인 건축가들의 꿈과 이상을 펼치기에도 차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 시절 각광받았던 서울 열 두 곳의 동네를 하나하나씩 펼쳐보이면서 그곳의 주택개발 역사와 특징, 그리고 주도적인 인물과 시사점에 대해 논합니다. 현재 부동산의 이슈도 특정 지구별로 논해진다는 면에서 무척 흥미로운 방법론입니다. 저도 각 챕터별로 기억에 남았던 점에 대해 메모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1. 우리나라의 대표 한옥단지, 가회동과 건축왕 정세권
북촌에는 조선인이 살고, 남촌에는 일본인이 살았다고도 하죠. 가회동은 한옥촌으로 유명한데 여기 한옥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집단적으로 조성된 단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인 개발업자 중 가장 유명한(...그리고 양심적인 축에 들었던;) '건축왕' 정세권은 한옥의 건축비가 양옥에 비해 매우 저렴하고 조선인들의 한옥 수요가 높다는 점에 주목해서 가회동 등 서울의 여러 요지에 개량 한옥을 공급합니다. 중정식(ㄷ자나 ㄱ자식으로 중간에 마당이 있는 전통 가옥 양식)보다 중당식(생활공간을 집약시키고 마당을 바깥으로 뺀 형태)이 위생과 편리함에서 월등함을 깨달았지만, 대중의 수요가 여전히 중정식에 있음을 알고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개량 주택을 계속해서 공급합니다.
이 분이 일세의 난 분이라고 생각된 게, 노인이 되고 현역에서 은퇴한지 한참 된 60년대에 이미 '미래에는 핵가족이 대세를 이루어서 중소형이 대세가 될 것이다'를 내다보셨다는 겁니다. 암요.

2.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촌의 서양식 주택
북촌에도 서양식 주택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중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분들이 선호한 주택이 양식과 화식(일본식)을 절충한 '문화주택'입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분들의 주거 생활이 실은 양식과 화식 뿐 아니라 조선식의 온돌도 버리지 못한 삼중 생활이었다는 거죠; 아참 그리고 문화주택에 대한 당시 대중의 동경과 열기를 보여주는 당시 기사에서 신여성에 대한 여성혐오가 고스란히 배어있던 게 웃겼습니다. 신식 집 사주면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들고 사기당하고 그런다 이거죠(...)

3. 서울의 중심, 인사동 일대의 변화와 박길룡의 조선주택 계량운동
이 장이 제일 재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택 개량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거든요. 딱 하나 기억나는 건 인사동에는 '한양의 중심이다' 공인 표지판이 있습니다. 끗.

4.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삼청동 주택지와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실험주택
저는 원래 삼청동 갈 때마다 헉헉거리며 '이건 뭐 회사 야유회나 와야 될 것 같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이 무슨 집들이 빼곡하게...'라고 느꼈었습니다. 알고 보니 원래 집도 거의 없고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위락지였는데 어느 사짜가 관하고 결탁해서 삼청동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려서 주택지로 개발을 했다더군요;;; 그러다가 원주민 분도 다치고...아이고.

5. 이상적 건강주택지, 후암동
조선인에게 가회동이 있다면 일본인에게는 후암동이 있습니다. 남촌을 점거했지만 알고 보니 건강에 별로였다는 걸 깨달은 일본인들은 볕 잘 들고 널찍한 후암동에 고급 단지를 짓고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쯧쯧쯧 나약한 일본인들;;;; 아 그리고 앞으로 마르고 닳도록 나오는 경성 대표 주택 3단지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후암동의 학강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 충정로의 금화장. (주택인데 '원' '장'을 붙이는 건 요즘 아파트 단지에서 '파크' '팰리스'를 붙이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있어보이려고)

6. 한양도성의 훼절과 고급 교외 주택지 개발, 장충동
장충동은 원래 금위영 관리 지역이라 도성 안에 있으면서도 매우 한산한 곳이었습니다만 교통이 편리하고 공지가 넓은 곳을 일제가 가만 두겠습니까. 일단 한양도성 헐고 조선 말에 항일 인사들 추모하겠다고 만들어 놓은 장충단(홍계훈이 항일인사라기 보다는 하필이면 자기 일이 일본에 맞서는 거라 죽은 거지만;)을 공원으로 바꿔버리고 유곽과 요정을 들입니다. 여기서 제일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던 건 경복궁에 있던 세자의 집무실을 헐어다가 일본식 요정을 세운 것;;;(참 얘네들은 꼼꼼하게 엿먹이는 짓을 잘 한단 말이야;;;) 그리고 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듣는 개발빌런; 동양척식회사의 자회사가 초고급 주택 단지를 개발해서 분양합니다.
제가 어그로를 끌었던 '이건희 회장 집은 왜 장충동에 있었는가'는 간단합니다. 일제 시대때부터 여기는 초상류층 살던 데였습니다. 그러니 해방 후에 이회장이 터를 잡았겠죠.

7. 그들의 전원주택지, 신당동
장충동에서 시구문으로 한양성곽 경계를 넘어가면 도성 밖에 공동묘지 겸 빈민촌인 신당동이 있었습니다...만, 성곽이 헐리고 교통이 뚫리니 이제 도심에서 매우 가깝고 재개발하기 용이한 동네가 된 셈입니다. 공동묘지는 옮기고 빈민촌은 허물어서 일본인 위주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만듭니다.

8. 경성의 학교촌과 조선인의 문화촌, 동숭동과 혜화동
성균관과 반촌이 있어 학문적 역사는 탄탄했지만 궁궐과 너무 가까워서 개발이 거의 되지 못했던(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개발이 덜 되어 있었다->호재로구나!이런 흐름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대학로 일대는 일제 시대가 되면서 궁궐도 무너진 판에 경성제대를 위시한 여러 학교가 들어오면서 학교촌과 문화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9.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 돈암지구
제 입장에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였는데요; 한성대 안암 일대가 돈암지구로 해서 최초의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도시계획 하에 한옥 신도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넓고 교통이 편리하고...에서 으응? 교통이 편리? 아참 이때 중심은 혼마치였지...마치 이것은 강남과 판교같은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좀 웃겼던 것은 이 때도 중산층 핵가족 조선인 월급쟁이들을 타겟으로 광고도 하고 활발한 마케팅을 했는데요, 그 광고 중 하나가 '남편들은 같은 직장 동료이고 서로 친밀한 젊은 부부 두 쌍이 있다. 한 커플은 돈암신도시로 집을 사서 이사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경성 안에서 셋집에 남아있던 나머지 커플은 아내가 병들고 남편은 알콜중독이 된다' ....이뭐병... 역시 부동산 마케팅에서 어그로와 공포 마케팅은 역사가 깊습니다.

10. 한강 너머의 이상향, 흑석동 그리고 토지 투기의 확산
일제시대에 한강 다리가 놓이면서 대경성권, 강북과 경성 밖의 강남은 교통이 매우 개선되었습니다. 한강을 운치있게 조망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권문세가의 별장으로 사랑받았던 흑석동은 장노년 일본인들의 고급 단지로 개발되었는데 일제 중후반이 되면서 조선인들 주택 수요가 폭발하니께 돈이면 다 하는 일본인 개발업자는 한옥도 엄청 지어 팔고 내선일체라고 막 갖다붙였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당시 붙여졌던 '명수대'에 거부감이 없이 아직도 지역명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

11. 최신 주거문화의 전시장, 충정로
사실 전 목차 볼 때부터 충정로에 완전 꽂혀 있었습니다. 이 책의 독서 과정은 충정로까지 가는 무한한 여정(...) 이 책에 나오는 열두 동네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살아 본 곳이고, 제가 사랑하는 서대문-마포 서울 서쪽 권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서울의 서쪽 권역은 한양 시절부터 중국과의 지리적 위치 및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무게 중심이 실린 곳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아까 외우라고 했던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 금화장이 위치한 곳이 되어버렸고 또 원주민 조선인은 쓸려나갔습니다(...)
아참, 아파트 얘기가 꽤나 자세하게 나옵니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괴건물 쯤으로 취급받는 '충정아파트'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거든요. 회계사회 오가면서 어머 저 오래된 건물 무서운데 포스있다;라고 주목했던 그곳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12. 관에서 개발한 주택지, 관사단지와 영단주택지
경성부윤(서울시) 뿐 아니라 동양척식회사 등 각종 공사 공기업의 임직원들을 위한 거주지, 관사는 기관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왜 궁궐을 뜯어서 관사를 짓는 거냐고;;; 관사단지가 생기면 대중교통이 연결확장될 만큼 개발의 중심이고 요지였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또 뭐 공기업 설립해서 총력투쟁을 위한 산업역군 주거단지로 양산형 주택단지, 영단주택을 관의 이름으로 개발합니다. 참 가지가지한다... 영단주택은 말은 내선일치라고 하는데 10평 이상은 일본인, 그 이하는 조선인용으로 철저히 차별적인 거였고요... 문래동 등지에 아직도 꽤 남아있는데 보면 뭐 우리 주변의 낡은 재개발 직전의 주택과 거의 구분이 안 됩니다. 모던한 양산형 클래식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다 읽고 나니 참 흥미롭고도 유익했습니다. 그간 주변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에 대해서 그 맥락과 이유를 알게 되니 직접적인 쓸모는 없어도 통찰을 기르기에 충분하군요. 아울러 대부분의 행정이라는 것이 일제 시대에서 개량되어 반복되어 왔다는 걸 생각해 볼 때, 부동산 정책을 이해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부동산 개발과 대중의 집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 주고요.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전 평면도 덕후인데 이 책에 수록된 평면도들이 대부분 너무 작고 흐리게 되어 있어 그 실제의 용도나 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과거의 흐릿한 자료의 한계가 있다면 수정 확대하여 이해를 도와주는 게 어땠을까(그리고 대학원생은 더 죽어났겠지)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의 생각을 해 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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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과 '퇴근해서 정말 지쳤을 때 먹을 요리' 얘기하다가 번아웃 레시피 얘기를 제가 꺼냈거든요. 그때 찍어놓은 제 책 사진도 있길래(이누카이 쓰나씨 죄송.... 그래도 컨텐츠 나와 있는 건 네 장이니 봐 주시길;) 잡담겸 올려 봅니다.

저는 요리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제게 요리책은 읽거나/사용하거나 둘 중 하나죠. 그 중 요즘 트렌드인 '대충대충 만드는 요리'책 류도 여러권 있습니다. 오늘은 그 대충대충 레시피북 얘깁니다.

1. 번아웃 레시피
이누카이 쓰나 (지은이), 김보화 (옮긴이) | 벤치워머스 | 2020년 4월
이 책은 바쁘고 지친 현대인들이 '사먹는 건 질렸고, 그래도 뭘 만들어서 먹고 싶다'가 느껴질 때 요리 기술 거의 없이 할 수 있는 레시피를 HP 5%/20%/50%/80% 남았을 때로 각각 분류해서 실어놓은 책입니다.

저 표지에 끌려서 작년 이맘때쯤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신간을 샀었습니다.

이건 HP 5%일 때 만드는 요리들 예시. 사실 이 책의 기획의도와 제일 맞는 것은 HP5%/20%일 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리시간은 1분~5분 내외고 대부분은 레토르트 꺼내서 따고 담고 부재료(파 등등) 가위로 숭덩숭덩 잘라서 담고 렌지나 토스터에 휙 돌리고 그 수준입니다. 요리가 아니라 거의 조합 수준이에요. 아참, 그래도 60%/80%일 때 카테고리가 의미가 없는 건 아닙니다. 여기선 대부분 고탄수 레토르트의 조합입니다만 죄책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냉동야채를 쓰는데 힘이 남아돌 땐 그 냉동야채를 다듬거나 사 놔야 되거든요;

이 책이 국내에 출간되었을 때는 평이 썩 그리 좋진 않았는데, '이게 무슨 요리냐' '사먹는 것보다 뭐가 이게 건강하냐' 비판이 주였습니다. 사실 뭐 워낙 레토르트 왕국인 일본에서 달짝지근한 양념된 가공식품(이 분들 마요네즈랑 치즈 엄청 사랑합니다)을 조합하는 거다 보니 딱히 건강식이라고 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명히 이런 거라도 조합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컵라면보다는 건강한 요리들인데, 여기 요리들이 컵라면에 물 붓고 기다리는 수준이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하다가 늘면(+시간이 어쩌다가 생기면) 요리에 재미가 붙어서 하나둘씩 할 수 있는 거죠.

2. 귀차니스트 즈보라의 아침밥/후다닥 아침 레시피
오노 마사토 (글),최유진 (옮긴이),오다 마키코 효형출판 2017-08-01


'즈보라'라는 일본어 자체가 '대충대충'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두 책 다 같은 일본 작가가 썼구요, 아침밥을 먹느니 차라리 5분이라도 더 자는 걸 택할 평범한 직장인을 대상으로 '그래도 뭐라도 먹을 기대로 아침을 깨는 게 낫지 않겠니'하고 삶은 계란부터 차근차근 풀어놓는 아침 레시피 북입니다.

제가 이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즈보라씨가 귀차니스트 개그할 때랑, 요리 여러가지를 늘어놓다가 무리수 개그할때, 그리고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나 파르페 등 '뭐 이런 걸...' 싶을 때 '괜찮아요, 살 안 쪄요, 아침이니까!'하고 데헷 거릴때 등등입니다. 주로 개그군요. 네, 제게 ㅇ이 책은 개그북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는 집에서 해 먹어 보았습니다. 한국 출판사 전언에 따르면 괴식같은 '토마토 치즈 덮밥'도 맛있다고 합니다;

3. 20만원으로 즐기는 혼 밥 한달 생존기+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혼밥 한 달 생존기(야채편)
오즈 마리코 (지은이), 김혜선 (옮긴이) | 숨쉬는책공장 | 2018년 2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분은 도쿄에서 사무직 직장을 다니면서 만화를 그리는 투잡러인데,월 식비 10만원+외식비 10만원=총 월식비 20만원으로 '슬렁슬렁 즐겁게' 살고 계신 분입니다. 가끔씩 돈이 남기도 함 ㄷㄷㄷ 그 와중에 스위츠나 커피나 맥주도 사먹음요. 그리고 살고 있는 집도 3.3평짜리 1LDK고 200L짜리 냉장고의 냉동고 면적이 47L인데 '넉넉해서 많이 넣을 수 있다'라고 좋아합니다. 화구 1개짜리 레인지를 쓰면서 '요리 간단하게 할 수 있어요'를 시전하는 거 보면 뭐지 싶어요;;;

실제로 보면 꽤나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즐겁습니다. 제가 워낙에 이런 생활류 만화 좋아하는 것도 있고, 본인이 '이런 나'를 꽤나 충실히 즐기고 있어도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식품 원재료가격(특히 소분)이 한국보다 싸진 지는 몇년 되어서도 있습니다. 저 재료로 장을 보면 한국에선 1.5배~2배는 족히 나올 겁니다;;;

뭐, 이래저래 투덜거려 놨지만 다섯권 다 머리 비우고 싶을 때 재독 다독하는 책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레시피를 써먹을 생각 안 하고 그저 보면 재밌을 책들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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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초였습니다. 감사 시즌도 끝났겠다 번 돈 쓰면서 염원하던 에스토니아 한 달 살기를 시전하려고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은 커녕 집 밖 나가기도 여의치 않아 스트레스가 점점 쌓여가던 어느 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부산 속의 부산 아닌 것 같은 공간 f1963으로 놀러갔었어요.

https://kiel97.tistory.com/entry/%EB%B6%80%EC%82%B0-%EC%88%98%EC%98%81-%EB%AC%B8%ED%99%94%EA%B3%B5%EA%B0%84-f1963%EA%B3%BC-%ED%94%84%EB%9D%BC%ED%95%98-993?category=763715 

 

부산 수영 문화공간 f1963과 프라하 993

5월5월 초에 갔다온 부산 수영구 망미동에 위치한 문화공간 f1963과 프라하 993등 입점 공간 구경 후기입니다. f1963은 원래 고려제강 부산공장이 있던 곳이었는데, 공장이전을 하게

kiel97.tistory.com

요건 그 당시의 후기. 그런데 그때 한 일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yes24 중고매장 놀러간 김에 당시에 판촉활동 나왔던 내셔널지오그래픽 대리님께 자발적으로 낚여들어가서 이 얘기 저 얘기하다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1년 구독을 질러버렸던 거죠.

 

1년 구독료는 19만2천원이었고 이건 네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추가로 얻어낼 수 있는 걸 한참 네고했었습니다. 결국 얻어낸 풀 패키지는

- 내셔널지오그래픽 베스트 단행본 3권

-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어판 1년치

- 내셔널 지오그래픽 영문판 6개월치

- 내셔널 지오그래픽 온라인 과월호 액세스권 1년+시사영어사 영어 강의 1개

- 전세계 지도(...)

- 부수입 : YES포인트(...)

근데 구독 결정해놓고 보니 제가 2003년인가 언저리에 이 패키지를 구입한 적이 있더라구요. 나새끼 그때 열심히 살았었구나 ㅋ

오프라인에서 받은 1년치를 다 합치니 이렇게 됩니다.

오프라인 아이템 중 가장 만족도가 높은 단행본들. '매혹적인 유럽의 보석들' 관광지 100선은 여행가고 싶을 때마다 보면서 시름을 달랬습니다.  세상을 바꾼 100가지 사건은 서구 위주이긴 한데 그래도 비교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 거라 보면 흥미있습니다. 최고의 기사도 단행본으로 가치가 있구요.

1년간 한국어 잡지 구독 소회는요...음, 미묘합니다. 저는 환경에 대해 관심이 많긴 합니다만 북극곰이 손바닥만한 얼음 위에서 오도가도 못한다던가, 집단 폐사한 새떼를 보는 종류의 자극에는 무진장 약합니다. 근데 첫 호부터 '절망의 행성'을 받았으니 기분이 어땠겠어요. 생각보다 '네이처' 도 아니면서 자연 환경과 과학에 대한 비중이 높아서 사회 과학보다는 자연과학에 관심이 덜한 저는 쫌 그랬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변수가 있어요.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우울한데 전 세계에서 코로나 때문에 죽어가는 모습..특히나 인도 뭄바이 빈민가 이런 데를 보여주면 이게 같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외면하고 싶은 건 아닌데 잠시 눈감고 싶은 기분이라고나 할까...으으. 저는 그냥 '론리 플래닛'이나 구독하고 싶었나 봅니다.

아, 그래도 2차대전 종전 기념 '2차대전의 마지막 생존자들' 특집과 'BLM 운동' '무죄로 판결받은 사형수들' '화성 탐험' 시리즈는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중에서 제일 열심히 읽었던 건 '알콜의 역사' 네 제가 그렇죠 뭐...

그리고 머리가 나빠진다 싶을 때마다 보면서 나라와 수도외우기를 하고 있는 세계 지도(...) 특히 아프리카쪽 보면 내가 이렇게 세계 지리 무식쟁이였나 하는 자괴감 형성에 좋습니다; 원래는 제가 여행했던 곳을 빨간 핀으로, 가고 싶은 곳을 파란 핀으로 표시하고 싶었는데 귀찮아서 아직 안 하고 있는 중.

온라인 과월호는 생각보다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고화질이 아니었고 가독성이 썩 좋지 않았어요. 시사영어사 특유의 그으 뭐랄까...구축한지 오래되어 답답한 홈페이지 양식을 고대로 가져와서 그런가 봅니다; 그리고 영어 강의도 결국 1년 끝날때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각종 온라인 학습터에 무료 강의가 넘쳐나는데 비해 별다른 메리트가 없어 보였어요.

 

투덜거림이 많긴 했지만, 1년동안 잘 봤습니다. 구독의 매력은 '강제성'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 1년동안 구독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관심이 많아도 아마 1~2호 정도나 사 봤겠지요. 한동안은 다시 구독할 생각은 없지만 또 모르죠. 한 20년 지나서 어느 부스에서 낚여서 1년 패키지를 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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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전 얼리버드 티켓은 5월~6월간 사용 가능합니다. 원래 5월만 사용 가능이었는데 수요예측을 잘못해서 긍가 사람이 엄청 몰려서 6월까지로 연장을 해줬죠. 저는 거기에 맞춰서 비행기를 예매하고 6월 8일에 서초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을 다녀갔습니다. 그 전부터 사람 많다는 악명은 들어왔는데 설마 평일 쌩아침 열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죠.

...많았습니다.

제가 탄 버스는 예술의전당에 정확하게 내리는 버스였는데요, 이미 내릴 때부터 대학생들과 아이를 동반한 어머님들이 우르르 내리길래 그냥 그들에게 묻혀서 갔습니다. 한가람미술관에서 예매권을 표로 바꿔서 일행과 도킹해서 줄을 섰는데 줄이 줄이...엄청나더라구요. 줄 사진도 찍었습니다만 초상권은 소중하니까 포기. 관람 인원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대기시켰다가 입장하는 뭐 그런 시스템이었는데 30분 기다렸다가 들어가보니 그래도 내부 관람 인원이 너무 많아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하긴 한가람미술관이 전시를 잘 한 적이 별로 있었나; 아 이건 한국 전시 관리 쪽의 얘기지만 작품명과 설명이 너무 깨알같은 폰트로 되어 있어서 보기 힘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중년이라 그런 것 같기도;

 

이번 전시회는 프랑스 피카소박물관의 소장 110여점이 왔는데요, 그이의 길고 긴 연대에 따라 구성해 놓았습니다.

1.바르셀로나에서 파리, 혁명의 시대

여기에선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 없었습니다. 제가 초기 청색시대를 좋아하는데 그때 그림이 안 와서 좀 섭섭했음;

 

2.질서로의 회복,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피카소가 고전주의 화풍을 그렸다는 썰은 여기서 처음 들었습죠; 그의 세번째 여인인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생활하면서 고전주의를 잠깐 시도했었는데 의외로 구도도 멀쩡, 색감과 비례도 멀쩡하게 잘 그려서 아아 역시 멀쩡한 걸 잘 그리는 사람이 변칙도 잘 그리는 거였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들 그린 그림에서는 사랑이 느껴져서 잠깐 뭉클할 뻔하다가 17세의 모델 마리 테레즈와 바람나서 고전주의도 결혼생활도 파탄났다는 썰을 보고 그럼 그렇지 하고 혀를 찼습니다.

 

3.블라르 연작

이건 프랑스의 유명한 화상 블라르가 주문한 에칭 판화 연작입니다. 에칭답게 워낙 가늘고 꼬불꼬불해서 근시처럼 눈을 찡그리고 한참 보지 않으면 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풍운아 미노타우로스 연작에서(이말년 말고 미노타우로스에 이렇게 집착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그의 육체미와 양감에 대한 집착을 알 수 있었으며, 화가와 모델 시리즈에서는 모델은 이쁘고 어리고 쭉쭉한데 화가는 쫌 뭐랄까 제우스같이 권세있고 나이도 있고 좋게 말하면 풍채랄까 그런게 느껴지는 나신을 당당히 드러내고 모델을 끼고 놀고 있길래 좀 입맛이 썼습니다. 애정은 차치하고 권력 관계가 그대로 느껴진다고나 할까요;ㅁ;

 

4.새로운 도전, 도자기 작업

니엡, 전 도자기 전문 작가가 이 방대한 작업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림과는 달리 여기서의 완성도는 좀 떨어져보였거든요. 하지만 원시적인 생명력은 참으로 엄청나서 그런 디테일들은 다 덮더라능. 아프리카 미술이 생각나는 작품이 꽤 많았습니다. 저는 목신이 새겨진 도자기가 맘에 들어서 일행에게 사져 사져를 시전해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5.피카소와 여인

여인이 바뀔 때마다 연대기가 바뀌었던 피카소답게 여인을 그린 테마를 따로 구성해놓았습니다. 거기서 제일 유명한 그림이 하단에 있는 이 '마리 테레즈의 초상'인데요, 저는 이 그림을 알고 있을 때는 피카소가 피카소했구나 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다른 여인들을 그려놓은 그림들하고 한 방에서 비교를 해 보니까 애정 뿜뿜에 그녀의 미모와 눈부신 젊음을 어찌나 이상화해서 잘 그려놨는지, 이런 선녀가 따로 없는 거예요. 첨 봤을 때에는 뭐야 아바타에 나오는 족속인가; 했던 그녀의 청색 피부도 어찌나 청신함을 잘 형상화해놓은 거던지요...근데 이번 전시회에는 포함이 안 돼 있는데, 마리 양하고 깨질때쯤 그림하고 비교하면 또 다르다길래 보고 싶은 악취미가 생겼습니다.

6.전쟁과 평화, "한국에서의 학살"

네 이번 전시회의 슈퍼스타는 이거죠. 아예 방 하나를 그림 하나에 할애해놓았습니다. 그림도 가로 2m라 큰 편이었습니다만, 게르니카(8m)에서 나오는 압도성이나 감동은 떨어진다는 게 같이 간 지인의 평. 사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체 안치소에 이은 반전 3부작 중 가장 평이 박한 편입니다. 이번 관람전의 주석에 따르자면...

사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에 기념비적인 입당을 하고 나서 처음으로 공개한, 정치 사상이 들어가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한국전이 냉전 시대의 비극이었고 유럽 각지의 공산당쪽에서는 미국을 등에 입은 남한의 북침썰을 제법 진지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보니 미제 총잡이가 한국 민중을 짓밟는 비극성을 생생하게 드러내주길 바랬는데...공개된 그림을 보니 썩 그렇게 미제와 한국 민중이라는 게 잘 드러나 있지도 않아서 실망을 했고, 미국은 미국대로 아니 우리 슈퍼스타 피카소가 빨갱이가 되더니 이런 그림을...해서 사망시까지 쫌 많이 힘들었다는 썰.

저는 이 그림 자체에는 아주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는데 그림의 썰은 재밌더라구요. 특히나 오른쪽의 박해자-왼쪽의 피박해자 구도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이나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과 궤를 같이 한다는 건 매우 흥미있었습니다. 둘 다 제가 좋아하는 그림이라 긍가;

 

7.마지막 열정

깐느해변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 감상으로 끝.

 

보러 가실 분들에게 팁을 드리자면 어차피 얼리버드때는 사람이 너무 많을 거라서 7월 초~중순에 어린이들 방학 직전을 노리고 정가로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 잘 봤습니다만 어차피 언제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면 좋은 환경에서 보는 것도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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