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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익명사이트에 쓴 글입니다. 전신인 다른 사이트에서 나름 익명 네임드(뭔 소리래;)였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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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한창 글 쓰고 댕기던 당시에 소개가 '남초 대기업에서 1n년째 화석으로 버티고 있는 여자 관리자'였는데 요 몇 년 동안 나에겐 참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어 ㅎㅎ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최근에 무기력한 목표 없는 여직원들에 대해 같은 여직원으로서 서글퍼하는 글을 읽고 여러 모로 생각이 많아져서 글을 쓰게 되었어. 그 글을 저격하려는 건 아니고, 별별 일을 다 겪은 사람으로서 개인의 관점은 이렇다는 글임.
 
글을 길게 쓰는 스타일이라 한 챕터마다 요약 제목 달면서 갈게.
 
 
1. 대한민국에는 두 유형이 아니라 수많은 스펙트럼의 여직원들이 있다.
 
한국 여성 직장인을 '능력있고 열정있는 여성 직장인'/'무기력하고 목표없는 여성 직장인' 극단의 두 타입으로 가르는 건 힘들어. 
 
일단 분류 잣대 자체가 지극히 한국 남초 직장의 잣대거든. 사람 갈아서 고속성장을 이룬 한국 특성답게 직장에 오래 머물면서 헌신하는 모습을 보일 때 높은 평가를 받고, 몰개성/집단적 특성이 있는 군대 문화가 살아있는 남초 답게 때론 윤리적 판단을 차치하고 '까라면 까는' 모습을 보일 때 높은 평가를 받음. 하지만 한국 직장의 대부분의 평가 잣대가 이렇다 보니 일단 이 분류 기준대로 나래비를 세워 봐도, 딱 10점/0점이 아니라 그야말로 제각각이 나옴. 
 
2021년에 집계된 여성 경제 활동 인구는 약 천 이백만명임.(https://www.index.go.kr/potal/main/EachDtlPageDetail.do?idx_cd=1572) 물론 여성 경제활동의 특성상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 활동을 영위하는 사람은 훨씬 많지만, 일단 논외로 하고 자영업자 감안하면 여성 직장인은 천만명에 가까울 거임. 이들의 연령, 경제활동 동기, 역량, 성향에 따라 +무한대부터 -무한대까지 수많은 포지션이 존재함.
 
 
2. 하지만 직장에서는 최우수에게만 기회를 주고, 최저는 빨리 도태시키면서 극단의 유형만을 전시한다.
 
수많은 여성 직장인 유형이 있지만, 회사에서 인식과 평가에 사용하는 건 딱 두 타입, '능력있고 열정있는 여성 직장인'/'무기력하고 목표없는 여성 직장인' 이 두 유형임. 대체로 한국에선 남성 직장인보다 여성 직장인에게 자신의 능력을 전시하고 평가를 받을 기회가 적게 주어지는데(뭐 이것조차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ㅎㅎ) 그들의 기준에 따라 최상위의 평가를 받은 극소수의 여직원들에게만 기회를 주고, 그보다 훨씬 소수의 여직원들에게 승진 등의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짐. 예전에 다이아몬드 천장일 때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악질인데... 아프긴 한데 암튼 겁나 박치기해서 뚫은 사람이 아주 소수지만 있긴 있단 말이지? 그러니까 뚫지 못한 대다수의 여성들에게 '거 봐, 할 수 있는데 너네가 능력이 안 되는 거라니까'하고 정당화할 수 있음.
 
아, 물론 업무 능력, 성실성 등 평가 기준에서 '회사에서 참아줄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최저의 '아웃라이어'들은 존재함. 근데 여직원에게 '참아줄 수 있는 한도'는 대체로 남직원에 대한 것보다 훨씬 박함. 내 구 구 회사에 일명 '(무개념) 3대 여직원'들이 있었어. 그들은 대기업에서 전국구로 소문날 만큼 무개념으로 유명했고, 여러 압박을 받다가 자의로 퇴직했음. 근데 그녀들의 무개념 행각보다 훨씬 더 심한 업무 태도에, 무능력한 남자직원들은 아직도 잘 지내고 승진도 했음. (아참, 역으로 내가 직장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니가 무개념으로 도태된 거라고 하는 뜻은 절대 아니니까, 셀프 쿠크 깨지 말길.)
 
 
3. 지금 살아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글쎄, 여성 직장인에게 더 엄격한 잣대로 도태시키는 것에 대해서 이유는 나도 정확하게는 모르겠음. 그러나 짐작하는 이유는 '대체 가능성'이라고 생각함. 여성을 뽑는 일자리는 공급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매년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취업 시장으로 나옴. 소모성이고, 대체 가능한 자원이 트롤 짓을 한다면? 더 어리고 무난한 자원을 뽑으면 됨.
 
이런 도태 필터링에서 걸러지고 지금 직장을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 님들은 엄선된 인재인 거임. 진부한 비유지만 님들은 수면 밑에서 미친듯이 발장구치면서 떠 있는 백조같음. 문제는 수컷 백조는 정상적인 물에서 치고 있지만, 님들은 발목을 잡아채는 게 많아서 더 미친 듯이 빨리 쳐야 한다는 거죠. 무기력하고 부유하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도, 한국+여성이라는 불지옥에서는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는 거임. 
 
 
4. 그 어느 것을 택하든 너는 소중하고 잘 하고 있다.
 
이걸 대놓고 깨닫든 무의식 중에 깨닫든, 대한민국의 여성 직장인들은 직장 환경과 자신의 여건과 역량에 따라 어떤 포지션을 잡아야 하는지 선택을 하고 있음. 두 유형으로 분류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지만=_= 낮은 기대치에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고,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추구하면서 달리는 것도 너의 선택임. 어느 쪽이든 자신이 뭘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역량이 그에 맞는지 자신을 잘 파악해야 함.
 
 
5.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화는 언제나 기대보다 느리고, 조직 변화는 자신을 갈아가면서 헌신해야 주어지는 자들이 만들어 감
 
앞에서 봐서 알겠지만, 내가 원하는 세상은 '평균의 여자에게 평균의 남자만큼 기회가 주어지고, 기대 이하의 여자에게 남자만큼의 인내심을 보여주는' 사회임.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변하는 속도보단 언제나 느림. 시스템 개선이라는 외부 변화를 기다리면서, 내부의 변화도 만들어 가야 한다는 얘기임. 그리고 고위공무원 여성 비율 개선처럼, 시스템의 급격한 변화가 있을 때 기회는 예측하기 힘든 순간에 끊임없이 준비하고 노력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경우가 많음. 그들의 숫자가 늘어갈 때, 판도 서서히 바뀌어 감. 그들이 한 선택이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라 해도, 같은 세대와 다음 세대 여성을 위해 좋은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음 
 
 
6. 네가 여성이라는 것과, 인생 길다는 걸 잊지 말 것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을 '탈여성'하는 경우를 종종 봄. '나는 보통의 여자들과 다르다'라고 해서 소속집단(여성)과 인정받고 싶은 집단(남성)의 괴리를 극복하려고 하는데, 결국 본인은 끝까지 여성이라는 쿼터 내에서 평가받을 거야. 그리고 자신이 얻은 기회도 선배 여성과 동료 여성들이 이룬 기회 덕분인 경우도 많음. 그래서 본인이 올라간 이후에도 여성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걸 주저하지 말아야 해.
 
드디어 최근 내 근황에 대해서 얘기할 때가 왔는데...몇 년 전에 난 과로와 직장 내 괴롭힘(한남 상사였음)으로 몸이 망가져서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서 조기 은퇴해서 파이어족이 되었음. 그 때 열라 비장하게 여직원 후배들한테 '내가 끝까지 버텨주는 게 너희들을 위해 도움이 될 텐데 끝까지 못 해서 미안하다'라고 얘기하고 눈물바다가...=_= 
 
아마 난 다시 태어나도 꾸역꾸역 일을 하겠지만, 내 자신의 체력적 한계와 본인이 지향하는 바를 조화시킬 방법을 찾을 거 같아. 한남들이 그런 거 참 잘해. 완급 조절을 해서 잘 보일 대상, 잘 보일 타이밍에 역량을 최고로 뻗쳐서 퍼포먼스를 내더라고. 하지만 그들은 좀 느슨해져도 한 소리를 듣지 않지... 언제나 완벽하고 잘 보이는 걸 좀 포기하고, 인생 어느 순간에는 뒤쳐지거나 느리게 가도 돼. 인생은 길어.
 
 
여러분, 개떡같이 말해도 대충 알아들으실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 다 소중해여... 사랑합니다 우리 존재 화이팅...늘 건강하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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