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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저자: 하인리히 뵐
출간: 1975년
국내출판: 민음사
번역: 김연수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하인리히 뵐(저는 이 사람 소설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고는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의 문제작입니다. 제목과 부제, 그리고 표지까지 아주 인상깊게 잘 빠졌죠.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꽤나 근성있게 살아온 젊고 매력적인 여자가 기레기한테 나흘만에 인격살인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스물 일곱살의 여자가 ‘짜이퉁’(독일어로 ‘신문’입니다. 꽤나 성의없는 작명인데, 누가 봐도 독일 대중 황색신문 ‘빌트’지를 빗댄 걸로 보여요. 저자부터가 서문에서 ‘빌트지와 유사하다면 불가피한 일임’하고 짚고 넘어가고 있고)지의 기자를 권총으로 살해하고 체포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여자가 왜 기자를 죽였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나흘 전으로 돌아가서 서사를 쌓아올립니다.

카타리나 블룸은 수배 중인 은행 강도(로 추정되는) 루트비히 괴텐을 숨겨주고 도망치게 한 혐의로 살인 사건 나흘 전에 체포됩니다. 루트비히 괴텐이 어떤 사람인지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가 여러 범죄에 연루된 건 맞지만 은행 강도라는 증거는 없고, 공산당 테러 조직의 일원이란 건 억측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사당국과 언론과 대중 시야에는 카타리나 블룸밖에 안 들어오거든요.

카타리나 블룸은 불우한 어린 시절과 결혼 생활을 마치고 도시로 상경합니다. 주로 그녀가 한 일은 가정 관리와 케이터링 쪽이었어요. 유능한데다가 일 중독일 정도로 밤낮 주말 없이 여러 일을 해서 차도 사고 대출을 받아 그럴싸한 아파트도 장만했습니다. 그녀는 외모도 매력적이고 해서 접근하는 남자들은 많았지만 수녀라고 불릴 정도로 조심성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 가정부 생활을 하면서 남자 주인이 접근하고-여주인이 해고하고 등등을 겪었는데, 거기서 기인한 철벽으로 보입니다. 자차를 장만해서 ‘드디어 태워주겠다고 추근거리는 남자들에게서 벗어났다’고 술회할 정도니까요.

그녀의 이 모든 덕성-젊음, 미모, 유능함, 경제적 독립, 그리고 성적인 면에서의 결벽은 루트비히 괴텐에게 끌려 원나잇하고 탈출시킨 사건 하나로 그녀에게 비난의 이유로 작용하게 됩니다. 황색언론 ‘짜이퉁’지에서 연일 쏟아내는 기사에 의하면 그녀는 공산당 테러 조직원의 정부로 자금줄로 집과 차를 사고(젊은 여자가 무슨 돈으로 그런 걸 사냐며 발작하는 건 어쩜 옛날이나 지금이나;;;)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사는 마타 하리쯤으로 묘사됩니다. 그녀의 결벽성이나 조심스러움도 냉혹함 내지 무정함으로 묘사되고, 주변인의 증언도 다 왜곡됩니다. 그녀는 이제 ‘시대사적인 인물’이 되어 ‘알 권리’의 대상이 되고, 모든 왜곡은 ‘알 권리가 있는 대중에게 더 잘 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포장됩니다.

나흘동안 그녀는 ‘짜이퉁’지의 모든 기사를 읽고 절망합니다. 다른 신문은 비교적 온건하단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짜이퉁지만 읽어요!”) 그리고 그녀가 집에 돌아오자 온갖 종류의 색정적 비난이 담긴 우편이 괴롭힙니다(그 중에 제일 짜증났던 건 이웃 인텔리 남자가 보낸 ‘그놈한테 주고 왜 나는 안 주냐 조만간 올테니 줘라 징징징’;;; 아 일남하고 한남만 영혼의 파트너인줄 알았더니 독남도 왜 이 꼬락서니)


결정적인 타격은 짜이퉁지의 기자가 시골 병원에 있는 어머니에게 위장 취재를 무리하게 하다 어머니가 죽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러고도 기자는 카타리나 블룸에게 죽음의 이유를 덮어씌우는 기사를 냈고, 여기서 이제 더 이상 잃을 사회적 평판도 뭐도 없는 그녀는 기자 살해를 감행한 거죠.

중편소설이고 비교적 가독성 좋은 드라이한 문체라 읽기 괜찮습니다. 문제는 주인공 이름 빼놓고는 다 독일 이름치고도 혀가 많이 꼬이는 괴상한 이름들이 다 거기서 거기같아서 좀 힘들었어요. 소싯적에나 전쟁과 평화에서 일리야 일리리이치 뭐 이런 거 읽었지 이젠 좀 힘들;;

서사만큼이나 흥미있는 건 저자인 하인리히 뵐이 자신의 저작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소설’과 ‘이야기’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경험을 주고받는 소통이 가능하냐로 구분되는데 근대 이후의 소설은 이 소통의 기능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 ‘이야기’ 또는 더 나가면 ‘팜플렛’이라고 하네요. 관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담론이지만, 이 사람이 현실과 아주 밀접한 낮은 곳에서, 현실의 이야기를 전달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40여년 뒤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소통하는 힘이 있어요.

아, 오늘의 카타리나 블룸은 기레기한테 총 들고 찾아갈 때까지 나흘도 안 걸렸을 겁니다. 인격살인은 하루면 충분하죠;;;

덧. 이 소설에서 제일 재수없는 캐릭터는 죽는 기레기가 아니라 카타리나 블룸에게 껄떡대는 인텔리 상류계층 유부남입니다. 카타리나는 자신이 불리한 오해를 받아도 그 남자를 밝히는 걸 거부했는데 그냥 ‘너무 싫어서’(“나같은 (노동계급) 여자가 그런 (상류층) 남자가 매력없다고 거부한 걸 누가 믿어주겠어요?”) 결국 카타리나와 그녀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다 몰락해도 껄떡남은 승승장구합니다. 하이퍼리얼리즘(...)

덧2. 전 ‘빌트’ 지를 근 30년전 이원복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로 처음 접했습니다 ㅋㅋ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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