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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에 한 번, 부모님 모시고 두 번째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딱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그럴 때면 제가 하던 방식대로 번호 매겨서 떠오르는 잡상들만 늘어놓겠습니다.

 

0. 매우 잔잔합니다. 현대의 극한 자극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잔잔하다 못해 심심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1. 이 영화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추억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입니다. 따라서 실화에서 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만, 감독이 타인의 삶에서 나오는 스토리로 어떤 감동을 줄 수 있는지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자전적인 스토리가 작품에 한번, 또는 여러번 묻어나오는 것이 나쁘다거나 소재가 한정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안 감독처럼 극단적으로 소재와 발화 방식을 바꿔가며 하는 것이 꼭 모범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하지만 이제 막 인지도를 높인 감독이 차기작에서 어떤 다른 스토리를 보여줄지 기대는 되네요.

 

2. 한예리는 연기를 잘 합니다. 요새 말로 '믿보배'죠. 안정적인 목소리 톤과 무표정한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생생한 감정을 전하는 표정 연기, 그리고 가녀린 소녀같은 그녀의 몸선마저도 연기 전달에 효과적인 도구입니다. 거기다 OST까지 잘 부르니 이런 보물.

그에 비하여 스티븐 연은 처음엔 연기가 너무...그으 뭐랄까 '난 이런 걸 해야 한다'라는 걸 생각한 단조로운 연기톤에 목소리도 썩 제 취향이 아니라 처음엔 아니 이 정도 인지도에다 오스카 노미니가 이런 연기란 말인가 하고 놀랬는데(스티븐 연 연기 제대로 본 게 처음) 가만 보다 보니 그 배역에는 그 연기가 어울리더라구요. 어깨에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단순한 남자.

 

3.스티븐 연이 연기한 아빠(아...또 영어 이름 까먹었다)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칸소로 이사가 트레일러에서 살면서 한국 채소를 일구는 자신의 결정을 '가족을 위한 것' 그리고 그것을 아내가 부정할 때마다 '(그럼 니가 아니라고 하니 너 빼고, 너와 내가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저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아이들이 첫번째로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함께 모든 가족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겠지요. 그것을 위해 잠깐의 고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하는데...그 고생이 보통이 아니잖습니까. 일단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고 이민 생활 10년을 엘에이에서 한 도시여자가 열악한 가사환경과 휑뎅그렁하고 친구없는 상황을 견뎌야 하고, 이 가족의 의사결정에 매우 중요한 변수인 아들의 심장병원은 몇 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농업이라는 게... 이 땅의 전 소유자의 결말처럼, 한국에서도 자연 환경과 물가 변동에 따라 심한 등락이 존재하고, 미국에서도 초심자에게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4. 한예리가 스티븐 연을 못 미더워하고, 나중엔 심지어 떠나는 결정을 하는 건 그녀가 언제나 가정을 첫 번째로 두고 헌신하는 사람이고, 그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티븐 연은 농사를 하러 올 때도 그랬고, 가정의 수도관을 끌어다가 야채에게 아낌없이 털어넣을 때도 그렇고, 아들의 병원에 꾸역꾸역 야채 샘플러 박스를 들고 올 때도 가정보다 자신의 꿈, 농사를 잠시나마 우선으로 했었습니다. 결국 그 노력이 인정받아 '모든 것이 잘 되었'을 때, 스티븐 연은 그 결과를 중시하고, 한예리는 과정에서 남편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또 이런 등락이 반복될 경우 남편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됩니다. 둘 다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제가 쓰는 투를 보면서 제가 누구 편인지는 충분히 캐치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5.가족의 아칸소(저는 아칸소하면 전세계 최고의 한량 빌 클린턴 말고는 생각나는 게 딱히 없습니다) 적응기가 어느 정도 매듭지어지고 루즈해질 때 할머니, 윤여정이 나타나서 극에 약간의 코믹함과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저는 이 할머니가 손주들이 기대한 '미국적 할머니의 전형성'에도 벗어나고 '한국적 할머니'(왜 한국 남자들이 아련하게 회상하는 나한테 잘 해 주시고....말고는 구분할 수 없는 그 할머니상 있잖습니까)에서도 윤여정만 보여줄 수 있는 개성을 생생하게 불어넣었다고 생각합니다. 레슬링 취미야 한국 할머니들이 의외로 즐기는 취미니 차치하고, 새로운 삶에 대해 보여주는 호기심과 포용성이 아주 큰 존재죠.(아, 그런데 같이 본 한 분 의견은 '그냥 보통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할머니던데'라고 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저는 윤여정씨가 국민 비호감으로 불리던 30여년전...뻥 좀 섞으면 40년전부터 그녀의 팬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독특한 개성이 젊은이들로부터 '힙하다'라는 호감을 받는 요즘이 살짝 믿기지 않으면서 사실 좋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40여개의 상을 휩쓸어가면서도 영국에 대해 '스노비쉬한 너네가 나한테 줄 줄 몰랐어 얘'하고 총기 있는 멘트를 날릴 때 그래 저 분이 내가 사랑하는 윤여정이지 하고 그저 이 순간들이 즐겁습니다. 그녀가 아카데미를 받든 말든 지금은 그녀의 인생의 또다른 정점이자 늘 퇴화하지 않고 발전하는 그녀가 뭔가를 또 이룬 시점이고 그 자체로도 의미있습니다.

 

6. 아부지는 이 영화에 대해 '뭐야 왜 하다 말다 하다 끝나'라는 간단한 평을 내리셨습니다.(한 번도 딴 짓 안 하고 성실하게 보셨으면서 참...) 그리고 며칠 있다가 '근데 걘 어떻게 됐냐'라고 뜬금없이 물어보셨습니다. 정말 뜬금없는 맥락이라 어느 집의 걔인지 몰라 네?하고 물어보니 '그 동생은 몸도 좋아지고 잘 됐는데 여자애는 어떻게 된 거냐고' 하고 재차 물으셨습니다. 아, 앤.

데이빗(앨런 킴)은 심장이 아프다는 설정 말고도 개성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누나 앤은 어머니의 걱정을 공감하고, 어린 동생을 언제나 보호자로 챙기는 어른스러운 아이죠. 하지만 그녀가 가족에게 잘 할 때 말고, 그녀 자체로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학령기이니 스쿨 버스를 타고 학교는 갈 텐데 그런 장면 자체가 아예 안 나와요. 소위 말하는 기능적인 존재인 건가.., K-장녀의 전형성인가 좀 서글퍼졌다가 앤은 누구보다도 덤덤하고 사랑스럽게 잘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제가 '아픈 아이의 손윗 보호자 형제'라는 역에 지나치게 이입해서도 있을 겁니다 ;ㅁ;

 

-흐지부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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