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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노자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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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서울의 외노자 공노비가 되었는가-(1)

추억팔이하면 나이든거라던데, 뭐 어쩔 수 없죠. 시간을 거슬러가서, 97년-제가 붙어놓은 서울대를 포기하고 집에서 도보 통학 가능한 지거국을 갈 때로 돌아갑니다. 사실 제 인생은 포기와 적응의 연속이었던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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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노자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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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서울 외노자 공노비가 되었는가-(2)

제가 하고 많은 고시-유사고시-준고시 중에서 회계사를 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 전공이 경영학이거든요. 물론 그 시대의 지방 인문계 여고생이 그러하듯(개중에서도 제가 다닌 여고는 미션스쿨이라 긍가 쫌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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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중인 보고서에 이런 거 저런 거 좀 고쳐줬으면 좋겠다고 피드백이 와야 하는데 안 오네요. 일단 3편이나 계속 씁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2002년이 되었습니다. 2월에 전 졸업하고 백수가 되었죠. 마침 합격자수도 천 명으로 늘었고, 유예생(당시 고시는 1차 시험 합격자에게 그해, 그리고 그 다음해 두 번 응시권을 주고 과목 중에서 하나라도 과락이 발생하거나 합격인원 등수 밖이면 싹 떨어뜨리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두 번 떨어지면 리셋되어 1차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은 부분합격이라 시간이 해결해주는 식이더군요)이던 저는 '이번엔 붙겠지' 기분으로 맘편했습니다. 당시에는 5백명에서 천 명이 되는 게 저한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사태를 인식 못 하고 있을 때니까요. 세상 잘난척 하지만 3년 넘게 공부를 하다 보니 세상 물정에 좀 어두워져 있었나 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당시는 2002년 월드컵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열광의 도가니판이었는데요, 그리고 제가 살던 곳은 원체 좀 정열...적이기도 했고, 전무후무한 월드컵 본선 첫번째 승리를 일궈낸 때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축구를 꽤 좋아해요. 게다가 이탈리아 팀도 잘생겼고, 스페인 팀도 잘생겼고... 카시야스, 인자기, 말디니... 추억의 그 이름들...말디니 오빠 이번에 확진판정 받으셨던데 아무쪼록 완치되시길 미남의 별 아래서 빌어봅니다.

그리고 저는 또 운명적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른쪽 분요. 아니 실은 1+1...더블더블 콤보...

시간이 없고 뻘짓을 하면 안 될때마다 불타오르는 제 종특답게 저는 시험을 불과 한달 앞두고 금사빠적 사랑에 불타올랐습니다. 남들 보기엔 공통점이 없다고 하지만 대체로 저는 메이저 안에 마이너같은데 코어가 탄탄한 쪽에 불타오르는 특성이 있습니다(다다음번에는 이 공식도 좀 깨지는 편입니다) 김남일송종국이 메이저였지만 황홍도 꽤나 매니아층이 탄탄한 장르...(머나먼 황령산) 그나저나 저 분들 저땐 세상 다 산 노장 취급을 받았는데 지금 보니까 제 막내 사촌동생보다 더 어리네여 어허허허.... 그리고 서브로 반지의 제왕 2차 창작에도 좀 빠져있었고 슬램덩크 동인계도 곁다리로...(어이구 창밖에 벚꽃이 만개했네여...)

3-4위 결정하는 터키전 치르고 딱 4일 후에 저는 한양대에서 2차 시험을 치렀습니다. 결과는 추석을 끼고 나왔구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습니다. 시험 평균성적이랑 비교해 보니까 꽤나 우수해보였다는 거지만 수석 차석 아니면 등수는 의미없죠. 도대체 재무관리는 왜 그렇게 쓸데없이 잘 나왔지 그날 어쩐지 화장이 잘 먹더라니;;;(헛소리중)

회계사 업계는 입도선매 시장입니다. 합격자 발표가 추석 언저리에 나오고, 당일-다음날-그다음날쯤 소위 말하는 빅4, 삼일-안진-삼정-한영이 한꺼번에 면접을 봐서 바로 합격여부 발표를 내고, 그 다음 소위 말하는 중견이나 로컬이 면접을 봅니다. 그러나 2001년까지는 빅4에서 수습 회계사 거의 모두를 트레이닝시킬만한 여력이 있었고, 수습을 떼고 라이센스 등록을 마친 후 자기 살길 찾아서 이직하는 게 보통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카드사태 등등 IMF 아시아 외환위기 를 극복해보려던 한국 경기부양책의 헛점이 드러나면서 버블이 살짝 터졌어요. 당시에 회계법인 몇개도 직격탄을 맞았고 합격자는 두 배로 늘렸지만 빅4는 150명-200명밖에 뽑지 못했습니다. 로컬은 신규를 굳이 뽑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구요, 남은 800명은 이제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1년차 수습 교육때 금융감독원 앞에서 살 길 찾아달라고 시위할 때 참여하기도 했지만 여의도 칼바람을 맞으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니...'란 기분이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3년 동안 꽤나 무디고 나이브해졌던것 같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지역 안에서 한정하자면 제 학벌은 괜찮은 편이었고, 아마도 그 지역 안에서 저는 합격자 중에서 제일 어렸을 테고, 전공자였고 학점도 제일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처참했던 다른 분들에 비하자면 영어도 잘 했고 말이죠.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참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지역 내 회계법인 지사에 면접보러 가면서 '설마 내 자리 하나 없겠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당시 얘기에 따르자면 그 지역 내 회계법인 지사들은 '여자는 한 명은 뽑자'라고 도원결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들어갔을 땐 남자친구 있냐 결혼하면 그만둘거냐 애 키우면서 되겠냐 등등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고용노동부에 집어넣을만한 빻은 소리를 한참 해대더니(...근데 최근 업계에서 들은 얘기로는 2014년에 합격하신 분도 비슷한 면접을 봤다고...아아 서울은 강제로 후두려맞아서라도 개명하는데 어떻게 발전이 없어 발전이...) 결국 저를 떨어뜨리고 비전공자에 미모의 분을 뽑으셨다고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고시반 남자 선배분들이 실실 웃으며 알려주었습니다. 그들은 물론 다 붙었죠. 그 후로 제가 몇달을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취직하려고 고생하는 걸 꽤나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걸 보면 공짜로 고생포르노 관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문제도 풀어드리고 꽤나 친절하게 대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이틀만에 전국의 입도선매는 끝났으므로 이제 회계법인 장은 끝났습니다. 글쎄요, 제가 지사 면접을 포기하고 바로 본사로 갔다면 취업에 성공했을까요?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당시에 제가 존경하던 지도교수님이 "음 그래 키모씨야 너는 똑똑하고 잘 하지만 뭐랄까 조금...딱딱해서 여성스러운 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도 있어..."라고 빻빻을 시전하셨거든요. 아직도 그 교수님이랑은 잘 지냅니다만 일생에 도움이 안 되기로는 선배들과 비슷합니다. 

마침 9월 중순이라 일반 회사 취업은 반쯤은 날렸지만 해 봐야죠. 마침 몇개 금융공기업과 대기업 재무팀은 일반 직원 공채에 회계사 자격증을 얹어서 뽑는 상황이었습니다. 2002년은 인터넷 응시와  오프라인 지원이 기묘하게 섞여 있을 때라서울과 고향을 정신없이 오가야 했습니다. 원서쓰는 법도 잘 모르고, 토익 점수 새로 따고, 면접하는 법 익히고... 그 와중에도 또 사랑은 불타올라서 아까 그분이 잠깐 몸담던 포항 스틸러스에 직관하러 정신없이 스틸야드를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무궁화호(...) 입석으로 올라가서 채용 직전 신체검사를 받던 중, 최고혈압 80을 찍게 됩니다. 아니 이건 원래 제가 아니고 웅앵시전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든, 20대의 작고 마른 여자가 그렇게 전국을 누볐으면 그럴 수도 있죠.

그러던 중 2002년 연말에 부모님이 들어서 흐뭇해하실 회사 세 군데에서 비슷비슷하게 통지가 날아옵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에 가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됩니다.(그 중 하나, 실제로 신입 연수까지 며칠 받았던 모처는 좀 웃기는 면접기라 따로 글 쓰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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