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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져버린 모 익명사이트에 제가 대략 6년 전에 썼던 글입니다. 정작 다른 분이 이 글 등등을 잘 갈무리해놓으셨다가 후신인 모 사이트에 최근에 올리셨더라구요.

6년 전과 현실은 그닥 달라진 건 없는 듯 합니다. 세상은 바뀌지만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느린 속도지요.

...아참, 모 남성분들이 검색 등으로 찾아오셨다가 다짜고짜 반말+혼잣말투로 '니 능력이 떨어져서 피해의식으로 그런 게 아니냐' 이렇게 물어보시는 댓글 다시던데 이 글에서는 그 꼴 안 봤으면 좋겠네요. 근데 그런 분들은 꼭 글을 뜨문뜨문 읽어서 이 부분은 안 읽더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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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부터 조금 털자면 나는 남초 대기업 다니는 13년차 화석...아니 중간관리자 여성임. 그리고 소위 여자에게 좋은 직장, 안 좋은 직장 다니는 친구 몇명 보유.

내 회사는 '여자에게 좋은 직장'이라고 불리는데...걍 웃김요. 어차피 한국에서 직장이란 직장인의 지옥인데 여자한테 직장은 조금 더 불 세기가 센 지옥임. 그리고 여자에게 좋은 직장이란 연옥 정도인데 그걸 가지고 남자들이 으시대는 게 매우 눈꼴심. 그 회사 다니면서 남자한테 진이 빨려서 굳이 회사 밖에서 남자님을 모시고 싶지 않아 독신인 본인임. 그 '좋은'이 출산과 육아라는 여성성에 필요한 최소한을 보장해 준다는 건데 당연한 천부인권을 뭐...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천부인권이 보장 안 되는게 대한민국 직장인이잖아요?

그리고 나도 13년전에 취업으로 구르고 굴러서(신용카드 사태때였음...취업 망) 취준냔들이 이런 걸 다 고려하고는 취업할 기회가 매우 줄어든다는 것은 알고 있음. 하지만 너냔들이 받는 취업 정보란 지극히 남성중심의 정보일 경우가 많으며, 그들에게 좋은 직장이 너냔들에게 좋은 직장이 아닌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두길 바람. 그리고 '여자들에게 좋은 직장'이라는 것이 과연 '나'에게 좋은 직장인지라는 것도 생각해 두길 바람.

대체로 여자들은 직장에서 두 가지 중요한 이해관계를 가짐.

1)입사 3~4년 후 출산-육아 테크를 탈 때, 최소한의 출산휴가(90일)와 육아휴직(1~2년)이 보장되는가? 아이를 키우면서도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으며 육아 관련 복지가 제공되는가?
2)남성에 비해 과히 불리하지 않은 급여와 복지, 그리고 승진이 가능한가?

1)과 2)가 분리되어야 할 것은 대체로 한국에서 여자들에게 좋은 직장이라고 할 경우, 1)은 보장되지만 2)는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임. 이것은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달린 것임. 본인이 아내와 어머니로서 정체성이 우선일 경우(맞벌이를 하면서 왜 본인이 이걸 더 떠맡아야 하는지는 논외로 합시다) 2)가 보장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음. 그러나 나처럼 출산과 육아를 포기하거나, 혹은 맞벌이맘이라도 자신의 커리어가 중요한 경우 2)가 보장이 안 되면 빡치기 마련임. 실무직원에서 여자가 많다고 해서 여자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님. 관리자 이상급 비율이 중요함.

그럼 대한민국의 직장 별로 대체적인 상황을 설명하겠음. 겪은 거+주워들은 거 위주니 일반화 등등이 당연히 있을 수 있음.

(1)공무원, 공기업/공공기관 직원, 교사, 은행원
대표적인 '여자에게 좋은 직장'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임. 출산휴가 90일이 보장되며, 아이당 육아휴직 1~2년 가능함. 본인도 여기에 속해 있음. 그러나 여기가 2)여성의 커리어에 좋은 곳인지는 의문이 남음. 이곳은 대체로 실무 직원은 여성의 비율이 1/3 이상, 또는 여초이지만 위로 올라갈 수록 여성의 비중이 팍팍 떨어지는 구조를 가짐. 고로(+모성보호법을 지켜야 하는 공기업/금융 특성상) 어머니로서의 권리와 복지는 보장되지만, 승진과 급여에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함.

내가 있는 곳은 여성 대졸 정직원이 본사 팀장급 이상으로 아무도 없음. 준팀장으로 2명 정도 있는데, 동급의 남직원들에게서 업무로 미친듯한 견제를 받음. 그녀들은 일과 인성 평판에서 소위 말하는 여성성을 탈피하는 것(워커홀릭, 밤샘 음주 불사)로 이를 견디고 있음. I은행만 봐도 지금 행장이 여성대통령 집권시기를 타지 않았으면 행장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 그리고 S은행도 이때싶 해서 여성 부행장을 올리긴 했는데...이 때 아니었으면 안 되었겠지(그런 비비기 인사할 여성 인재도 못 키운 우리 회사 에라이) 결국 이 유리천장에서는 보여주기식 인사 말고는 여성임원은 될 가능성이 거의 없음.

공무원은 좀 다르지 않겠냐...하면 S대 나온 내 친구 얘기를 해 주겠음. 행시 재경직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그 학교 교수가 '여자애들은 어차피 재경부에서 못 크니까 여성부나 그런 데 가. (남자애들한테 지망 물어보고 환경부 이런 거 나오니까) 에라이, 못난 놈아'

(2)국내 대기업
그냥 딱 한마디로 요약됨. 미생의 선차장.
대체로 (1)에 비해서 1)의 여성성, 출산휴가/육아휴직/복지가 떨어지나 그룹바이그룹임. 이는 (1)보다 준법 규제는 떨어지고 시장 논리가 심하기 때문. 노예는 부지런히 굴려야 되는데 노예가 애 낳으러 가면 일을 부릴 수가 없잖음?(조선시대에도 출산휴가는 줬다고 하지만 일단 제쳐둡시다. 조선시대에는 역병 돌면 외빈 초청 행사도 미뤘다는데 우린 오라고 난리잖아.) 그러나 오너의 성향에 따라 다름. S그룹 등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비교적 불이익 없이 사용 가능하다고 함.
그러나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의 여성 직원들은 출산, 육아 후부터는 48시간을 살면서 업무와 육아의 헬 오브 헬 속에서 분투함. 그리고 유리천장도 만만치않음.
아, 그리고 대기업이라고 하면 재벌 그룹만 생각하는데 알짜배기 중견기업 중에서도 여성 복지와 처우가 좋은 곳도 꽤 많음.

(3)외국계, 일부 여초 기업
글로벌 스탠다드가 적용되는 곳에 한함. 말이 외국계지 한국적 특성이 강한 경우 그냥 국내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으로 보며 됨.
글로벌 스탠다드가 적용되는 일부 외국계 기업의 경우 출산휴가, 육아휴직이 비교적 자유롭게 가능하며 승진이나 급여 차이도 아주 심하진 않음(똑같진 않아요) 이걸 어떻게 체크하냐면 여기 재직 남직원들이 '승진이나 업무에서 여자들 기에 눌린다' 호들갑을 얼마나 떠는지 보면 됨. 아이고 그렇게 기에 눌리셨쎄요?

(4)국내 중소기업
....오래 다닐 수 있나?
일단 타의에 의해서 출산휴가도 보장이 안 되고 육아휴직시 불리한 경우가 허다함. 따라서 국내 중소기업의 경우 상당수가 '여직원'혹은 '대리님'만 숱하게 많고 과장 이후로는 거의 보이지 않음. 참 이상도 하지. 분명히 뽑을 때는 많이 뽑았는데 다 어디로 갔을까?
맞벌이맘의 경우 분투하긴 하지만 야근과 회식을 100% 해내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승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아지며 버틸 경우 자신의 커리어는 거의 포기하는 경우가 많음.

그럼 넌 뭔데 갈 수 있는 곳이 중소기업이 태반인데 대기업 다닌다고 지금 유세인 거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나의 취지는 아까도 말했다시피 네가 취업시 연봉과 업종을 보는 것처럼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네가 탈여성하고 싶어도 너는 여성 쿼터 안에서 취급받음) 얼마나 어떻게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하는 게 필요하다는 거임. 내가 아내와 어머니로서 정체성이 더 중요한가, 커리어도 중요한가?
그리고 회사 정보를 구할 때 여성으로서 어떻게 다니는지 여성 멘토에게서 정보를 구할 것. 또한 경제지 등에서 발표하는 '가족 친화적 직장' '여성 관리자 인터뷰' 등을 적극 참고하고, DART에 공시되는 남성/여성 비율 연봉 차이 , 근속연수도 참고할 것. 아무리 그래도 이런 취업 지옥에선 국내 중소기업에서 뽑아주기나 하면 다행이잖아!라고 할 수 있음. 그럼 경력단절을 각오하고 회사를 옮겨서도 특화할 수 있는 직무와 자기계발에 힘쓰는 수 밖에.

아이고...다들 지옥에서 힘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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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정권 때는 변화의 속도가 더 느릴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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