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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베이징 올림픽 여자 싱글 피겨스케이팅에서 은-동 후보였던 쉐르바코바가 금메달, 역시 은-동 후보로 비슷했던 트루소바가 은메달을 타고 유력한 우승 후보이자 올림픽 이전 경기에서 도핑한 것으로 밝혀진 발리예바는 4위에 머물렀죠. 경기가 끝난 후 트루소바는 자신이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이라는 데 대해서 아쉬운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며 코치진을 원망했습니다(이 표현은 극도로 정제된 것입니다)

저야 개막장 좋아하니까 흥미진진하긴 했는데 미셸 콴 때부터 피겨 좋아한 라이트팬(소치 이후로는 월드 경기 정도만 챙겨보니까요)으로서 어쩌다가 이 종목이 이 꼬라지가 됐나 참담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 관점에서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제 썰은 좀 길어서 3줄 요약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2011년에 개편된 채점제도 하에서는 각 기술의 완성도보다는 고회전 등 난이도 높은 기술을 장려한다
- 러시아는 이런 제도 개편에 극단적으로 맞춤형 답안의 어린 여싱들을 배출하고 있다
- 그래도 도핑은 상도덕 다 포기하는 공멸의 길이다

아울러 논란의 떡밥 '김연아가 돌아와도 발리예바에게 밀릴 것인가'도 힘차게 물어 보도록 하겠습니다<-넵 저도 무리수라는 거 압니다.

피겨 신채점제도 2.0
원래 공식 용어로 2000년대 초반 현재 개편된 제도인 신 채점제(점프 하나하나 등 각 기술과 수행요소마다 촘촘하게 점수를 매기고 총점 200점 300점 뭐 이렇게 합산해서 총점 높은 사람이 우승합니다.), 이전 제도인 구 채점제(6.0 만점 보신 적 있으십니까? 당신은 고인 물입니다;)가 있습니다. 그런데 뱅쿠버 올림픽 후, 그러니까 2011-2012 시즌 때 이 신 채점제에서 획기적인 개편이 있었습니다. 큰 내용만 말하자면

- 각 점프마다 주어지는 가산점 최대 3점에서 2점으로 조정(설명충 들어가자면 점프 점수는 점프 난이도를 반영한 기초 점수와 비거리, 높이, 착지 등의 완성도를 반영한 가산점 합으로 이뤄집니다)
- 점프별 기초점 조정(같은 회전 수 점프 내에서도 고난이도 점프 기초점을 올리고 저 난이도 점수를 낮췄습니다)
- 매 경기 내 더블 악셀 점프 최대 수 2회로 제한
등등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스파이럴 시퀀스를 없애고 뻘하게 짧은 코레오 시퀀스로 대체하는 등 아쉬운 변화가 아주 많지만 암튼 이런 거죠.

이 제도 개편이 주는 시그널은 명백합니다. 피겨 기술의 꽃 점프를 예로 들어 봅시다. 신채점제 1.0(아무도 이렇게 쓰진 않지만 설명을 위해서 이렇게 통칭합시다) 하에서는 점프를 크고 높으며 회전 수 꽉 채워서 깔끔하게 뛰는 사람이 유리했지만, 신채점제 2.0에서는 고회전 고난도 점프를 '시도'하는 사람이 유리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트리플 악셀-더블 토룹(3.5회전+2회전=5.5회전)의 최고 가능 점수가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3회전+3회전=6회전)보다 낮았는데 트리플 악셀 기초점 상승과 가산점 하락으로 최고점이 더 높아져서 역전됐구요, 회전 수 감점이 거의 없어진 2.0 관행과 어우러져 차이는 더 심화되었습니다. 비단 여자 싱글만 이런 것은 아닙니다. 2010년 뱅쿠버 올림픽에서 미국의 에반 라이사첵 선수가 쿼드 점프 하나도 없이 남싱 금메달을 차지했었는데 신채점제 2.0에서는 매우 힘들 일이죠.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김연아의 기초 점수가 소트니코바에(그녀는 금 당시 만 17세였고, 이제 만 25세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비해 근소하게 낮았던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러나 피겨는 기초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에 가산점과 수행점수에서 꽤 논란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이 때도 여싱은 3회전 점프 내 싸움이었습니다. 10대 초반에 점프 연성이 거의 끝나는 특성상 맞춤형 선수가 나오기엔 아직 일렀죠. 2018년 평창 올림픽 메드베데바-자기토바 때에도 점프 구성은 트리플 점프군 내에서 이뤄졌습니다.

시스템에 극단적으로 맞춘 러시아 여싱
러시아 여자 싱글 피겨 선수가 손바뀜이 심해진지 대략 1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여싱 소녀들이 명멸해갔죠. 패턴은 비슷합니다. 10대 초반에 주니어를 씹어먹습니다. 그리고 만 15세쯤 시니어에 데뷔해서 유로와 월드를 석권합니다. 운이 좋으면 올림픽 시즌이라 치열한 러시아 내 경쟁을 뚫고 출전해서 메달을 딴 후 불과 만17세 때 조용히 사라집니다. 소트니코바야 뭐 원래 국제경기에서 금 하나 없던 분이니 그렇다치고, 천재 소녀라 추앙받던 메드베데바도, 대신 금을 땄던 자기토바도 올림픽 이후 다음 세대에 대표 넘기라는 압력을 받고 이후 국제경기에서 미미해졌습니다. 만 24세인데 아직 버티고 있는 뚝따미쉐바는 극히 이례적이에요.

이번 시즌에서 탑 3를 석권하고 있는 발리예바-트루소바-쉐르바코바도 비슷한 성장 경로를 거쳤습니다. 다 주니어 시절부터 월드 클래스였고 지금 만 15세-16세죠. 아까부터 나이 얘기를 왜 이렇게 하냐면... 여성들은 10대 초중반에는 체형이 마르고 무게가 가벼워서 점프 등 요소 수행이 용이하죠. 만 16-18세 때 성장 호르몬으로 가슴과 엉덩이가 커지는 등 성인 여성으로 체형 변화가 옵니다. 이 때 무게중심 등이 다 달라져서 극심한 성장통을 겪는 경우가 있죠. 그걸 이겨내고 근육으로 다져서 파워풀한 퍼포머로 다시 태어나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만, 인재 풀이 넓은 러시아는 그걸 기다리고 기회를 줄 필요가 없죠. 다시 말하자면 10대 초중반, 청소년 시기에 가벼운 몸으로 석권하다 10대 중후반이 오면 실질적인 은퇴 수순을 밟는 겁니다.

거기다 신채점제 2.0이 도입된 근 10년 전은 이 3인방이 갓 스케이트 부츠를 신었을 때와 근접합니다. 신채점제 2.0에 극단적으로 맞춤화하여 키워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싱에서 제대로 수행한 사례가 극히 드문 트리플악셀부터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팡팡 뛰어댑니다. 점프에 타노가 가산점이 붙으니


(타노할 때 사진은 예쁜 게 거의 없습니다, 죄송)
은 언제나 붙여대구요, 제가 겁나 숭하게 생각하는 캔틸레버도...하...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아까 말한 것처럼 쿼드 점프죠. 여싱에서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쿼드 점프를 실제 대회에서 수행하고 있으니.(물론 회전 수 부족이나 엣지, 토픽 등 정석 여부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공식적으로는 경기화 경량화 등 기술의 발전, 비공식적으로는 읍읍... 등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만, 이들이 매우 어린 나이라 몸이 매우 가볍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겠습니다. 트루소바가 한 프리 내에서 쿼드 5개를 뛰면서 파란을 일으킨 게 시니어 첫 시즌, 2년 전이었는데 3시즌차인 지금은 성공 확률이 확연히 떨어집니다. 물론 그녀는 쿼드 2개를 뛴 쉐르바코바가 이긴 것에 대해서 매우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즉, 러시아의 극단적으로 빠른 세대교체는 신채점제 2.0이라는 토양에서 뚜르베제라는 걸출;한 코치로 대표되는 러시아 양산 시스템이 물을 주고 길러낸 결과라는 거죠. 이게 문제가 되고 있으니(재미가 없어요 재미가....) 올림픽 시니어 출전 나이를 만 16세로, 더 나아가서 만 17세로 상향할 예정입니다만 언제나 기대 이상의 맞춤형 솔루션을 내놓는 러시아이니만치, 근본적 대책이 없는 한은 크게 바뀔 거라고 보기 힘듭니다.

덧. 아, 김연아-발리예바 떡밥요? 지금 채점제에서 기초점만 따지자면 발리예바가 높습니다. 더 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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