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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저
공경희 역
출판사 포레
국내 출간일 2014년 01월 30일
원서 : Absent in the Spring

 

 

요즘 시간이 많고 판데믹으로 갈 데는 '거의' 없어져서 도서관 안심대출로 책을 읽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실은 몸 상태가 안 좋아지면 머리에 책도 안 들어오긴 합니다만;;;)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제가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소설 86권(이었나? 맞겠지...)을 완독할 정도로 팬인데 이 분의 비 추리소설(로맨스, 심리, 천재물 등 다양합니다)도 이 분의 향취가 제대로 묻어있다는 평을 들었거든요. 가독성이 좋아서 한번에 다 읽었습니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여주가 오프닝에서 죽으면 딱 애거서 스타일의 가족 살인 사건이네'
'역시 여행 갈 때는 시간 때울만한 걸 넉넉히 챙겨가야지'

이 두개였습니다. 뭔 소린지 좀 더 자세히 써 보겠습니다.

여주인공인 조앤은 스스로의 삶에 매우 만족하고 있고, 남들이 보기에도 그러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시골에서 평판 높은 변호사로 일하는 자상한 남편, 결혼이나 직장 선택이 꼭 맘에 들진 않지만(이건 나중에 자세히 나옵니다) 잘 자라주고 그녀를 사랑하는 1남 2녀의 자식들, 지역 사회의 유지로 각종 봉사활동으로 바쁘게 일하는 삶까지 뭣 하나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소설 첫머리, 여행지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여고 동창 블란치를 동정합니다. 블란치는 여고에서는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였지만 남자에 미쳐서 여러번 잘못된 선택을 한 후 자신보다 폭싹 늙어보이는 존재가 되었거든요. 심지어 한참 전에 조앤에게 자식에게 쓰려고 한다고 돈을 빌려갔다가 갚지도 않고, 그 기억을 일깨워주니 자기 취미로 써버렸다는 말을 할 정도로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여러 모로 동정하면서 자기 만족을 북돋워줄 존재가 아닐 수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면 갈수록 블란치가 조앤을 동정하는 것 같습니다. 조앤은 막내딸이 아프다고 해서 영국에서 이라크까지 열일 제치고 온 거였는데, 그 막내딸에 대해서도 '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라는 말을 늘어놓는가 하면 그 외에도 조앤의 완벽한 삶 하나하나에 대해서 의구심이 담긴 미묘한 말들을 늘어놓죠. 조앤은 블란치와 헤어질 때 다시 그녀를 동정할 수 있어서 감사하기까지 합니다.

여기까지는 잘 굴러갑니다. 그런데 음...20세기 초의 장거리 기차 여행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특히나 중동이나 아프리카를 경유하는 경우는요. 터키에서 기차는 멈춰서고 갈아탈 차는 오지 않습니다. 깔끔하고 숙식은 나무랄 데 없지만 무척이나 지루한 호텔에서 말 붙일 사람도 없이 기약없이 묵어야 합니다. 가져온 몇 권의 책은 다 읽었고 뜨개질거리나 혼자 할만한 카드놀이도 안 가져왔어요. 지인들에게 여행에 대해서 편지 쓰는 것도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니 지겹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블란치가 남겨준 여러가지 의구심이 스멀스멀 싹을 피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조앤은 지금까지 가족들의 삶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남편인 로드니가 결혼 후 법률사무소가 아니라 농장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을 때, 로드니가 잠깐 '남자 밝히는 여자'에게 눈을 돌릴 것 같을 때, 아이들이 잘못된 친구를 사귈 때 사춘기의 방황을 할 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 줬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며칠간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남편은 채산성이 맞건 안 맞건 자신의 꿈인 농부가 되지 못해서 아내를 죽도록 원망하고 있었고, 흔한 색녀 타입에게 넘어간 게 아니라 다른 여자, 아내와 정반대 타입인 '뭔가 꿈꾸는 것 같은 여자'를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랑(거기다 이 여자는 죽어버렸으므로 평생 환상 속에서 완벽한 셈입니다)으로 남겨놓았고, 그녀가 긴 여행으로 자신을 떠나서 '해방이다!!!'라고 좋아 죽을 것 같고, 애들은 그녀의 완벽한 통제가 싫어서 먼 곳에서의 일, 그녀가 찾아오기 힘든 곳에서의 결혼 생활로 도망쳐 버린 것 같습니다. 막내딸은 병(실은 이것도 그녀가 일으킨 치정 사건이었지만) 때문에 어머니가 찾아오자 남편과 의기투합해서 그녀를 빨리 보내버리려고 합니다.

여러 모로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의 추리 소설에 여러번 나오는 '가족 안의 지배자' 캐릭터와 맞아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캐릭터와 조앤이 다른 점은 조앤은 전업 가정 주부로 경제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도덕적 의무라 그렇다 치고 애들이 성인이 된 후에는 잡아놓을 수가 없어요. 만약에 아이들이 자립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같은 집에 두고 지배했겠지만요(...)

모든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충격을 받고 다시 태어난 그녀는 남편에게 돌아가 그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새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말미에서 남편을 만나요.(남편은 써프라이즈로 그녀가 나타나자 진심으로 좋던 시절 다 끝났다고 우울해 합니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 모든 것은 뜨거운 사막에서 소일거리로 산책할 때 열기로 피어오른 망상일지도 몰라요. 그래서 그녀는 예전의 명랑한 조앤, 남편과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사랑받는 완벽한 조앤으로 돌아갑니다.

과연 조앤의 삶은 어느 쪽이었을까요? 소설의 마무리에서 남편과 막내딸이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그녀의 '망상'이 사실이라는 암시를 주고 끝납니다만 저는 중간쯤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소설에서 남편과 아이들(한 명 빼고)처럼 자기가 뭘 진심으로 원하는지도 모르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대리 결정해주고 원망할 만한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그들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그녀는 그 가족에 딱 걸맞는 지배자였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여행갈 때는 스마트폰, 탭, 보조배터리, 여러가지 놀잇거리를 가져가서 망상에 빠지지 말도록 합시다. 자기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게 꼭 좋은 일은 아닙니다.

덧. '봄에 나는 없었다'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조앤의 남편이 로맨틱하게 봄에 대해서 늘어놓을 때 조앤이 눈치 없이 '우리'를 끼워놓자 '응 거기 너는 없어'라는 암시를 줬던 내용입니다. 뭘 그렇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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