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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팔이하면 나이든거라던데, 뭐 어쩔 수 없죠.

시간을 거슬러가서, 97년-제가 붙어놓은 서울대를 포기하고 집에서 도보 통학 가능한 지거국을 갈 때로 돌아갑니다. 사실 제 인생은 포기와 적응의 연속이었던지라 엔간한 건 별로 안 아쉬워하는데 서울대는 정말 아쉽습니다. 왜냐하면 전 제가 봐도 좀 뻣뻣합니다. 그래도 사회 물 좀 먹었다고 억지웃음도 지으면서 유연하게 굴 때도 있긴 한데, 그것도 디폴트가 뻣뻣한 가운데 나온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뻣뻣한 여자를 설명할 때 '쟤 서울대 나와서 그래'라고 하면 설명이 쉬워지는 구석이 있죠. 그리고 제가 그 학벌을 입고 있었으면 공노비가 된 후, 그리고 지금까지 숱한 '존재 의미 증명'을 위해 했던 자격증 수집이 좀 줄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포기했냐, 제가 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역차별의 시대에 무슨 아들과 딸스러운 얘기냐...라고 하실 수 있겠는데 즤 집은 남들 보기엔 중산층 안에서 약간 윗길로 보일 수도 있겠는데 가족 구성원 입장에서는 정말 실속없었습니다. 어릴 때는 정말 집이 금방이라도 망하는 줄 알았어요. 아부지는 머리는 좋으신데 실생활쪽은 약해서 재테크에는 재능도 없고, 개룡남답게 줄줄이 딸린 동생들에 부모 건사도 하셔야했고, 빌려주고 못 받은 돈도 많고(...) 그리고 이건 겪어본 분들만 아는 건데, 집에 중증 장애아가 있으면 돈이 아주 많이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를 돈 많이 드는 유학생활을 시킬 생각도, 서울로 '내돌릴'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습니다(아부지께서는 갱북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고장 출신답게 여자팔자 개팔자-여자는 내돌리면 깨진다 등등의 신조가 있었습니다-아니 지금도 있으시지 참...)

그래서 뭐, 학교는 공짜로 다니고 한 학기에 100만원씩 얹어 받긴 했습니다. 당시에 아주 훌륭한 여사님이 기부하신 장학금이 있었거든요. 그걸로 97년 여름에 호주 한달 어학연수도 다른 장학생 애들이랑 갔다왔어요. 90년대 한국식 버블의 막차를 탄 셈이죠.(여담인데 멜버른은 재미없고 음식도 맛없지만 시드니에 드글드글한 약쟁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97년 겨울에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98년 2학기를 끝내고 골똘히 생각이란 걸 해보게 됩니다. 경제가 망이라 졸업하는 예비역 92학번들과 현역 95학번들이 일자리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꼬라지를 겪고 있는 게 보이더라구요. 저는 가정사 등등으로 인해 좀 비관적이고 현실적인 편입니다. 그리고 예비역 92학번들에게는 쥐꼬리만큼이라도 돌아가는 입사 원서가 95학번 여자 선배들에게는 전혀 돌아가지 않는 것도 당연히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역 경제는 서울보다 더 열악해서 그나마 향토 기반으로 하고 있던 회사가 줄도산을 하는 꼴도 보였습니다.

저는, 음...학점이 좋죠. 아주 좋습니다. 근데 그건 이 시대에 별로 도움이 안 되어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회사에서 뽑아갈 만큼 예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2년 뒤에 제 자리는 학원 강사와 방문 학습지 교사(...분들께는 죄송합니다) 외엔 없어 보였습니다.(실제로 2001년~2002년에 졸업한 제 여자동기들 중에서 특출나게 예쁜 한 명만 롯데에 취직하고 나머지는 죄다 저 테크 아니면 공무원 준비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 비정규직(...이라는 용어가 처음 생기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청소 경비용역까지 죄다 정규직이었어요)에서 몇년 돈벌다가 그나마 어릴 때 20대 후반쯤 해서 어디 신실한 형제님과 결혼으로 퇴직하고 가정을 꾸릴 제 모습도요.

형제님과 결혼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98년 12월에 결심했습니다. 회계사 시험 공부를 하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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