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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2009 브레겐츠 페스티벌
연주: 비엔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출: 그래함 빅

아이다: 구 에티오피아의 공주, 현 암네리스의 노예
라다메스: 이집트의 젊고 전도유망한 장군
암네리스: 라다메스를 사랑하는 이집트 공주

여러번 말했다시피 저는 오페라를 좋아합니다. 뭐 딱히 고상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존내 노래도 잘 부르고 연주도 죽여주고 스토리는 대부분 마라맛 막장이고(...) 그래서 오르페오 채널에서 한 주에 한번씩 정기적으로 오페라 보여줄 때는 정기적으로 챙겨보고 했는데 요즘은 부정기적으로 해서 편성표 챙겨봐야 되고 쫌 귀찮습니다. 근데 이번주가 오페라 위크라서 오페라를 많이 하더라구요? 라 트라비아타는 하도 많이 봐서 걍 패스했고, 오늘 오전에는 아이다를 보고 오후에는 맥베스(꺄아아) 이렇게 볼 계획입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은 호수 위 야외 무대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브레겐츠에서 열리는 클래식 페스티벌인데요, 저는 이 페스티벌의 '마술피리'를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굉장했었죠.

마술피리는 이랬음.

아이다 얘기로 돌아가 봅시다. 무대와 의상은 현대식인데(다만 이집트를 상징하는 금색, 금색/청색을 곳곳에 쓰고 현대식 정장 위에 파라오의 관을 쓴다든가 19세기식 장군복을 입힌다거나 그런 식입니다) 오프닝부터 끌어안은 청춘남녀 익사체를 인양하길래 ㄷㄷㄷ했더니(너무 끌어올린 참치처럼 자세히 보여줌) 원작과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기사에서 얘기했듯이 자유의 여신상이 쫌 박살난 무대는 2009년 당시 전쟁 중이던 미국을 은유한 것 같구요, 누가 봐도 '정통' 금발미인인 암네리스 공주와 동부 유럽 이민자처럼 생긴 노예 아이다는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라다메스는 처음부터 눈새라서 혼자서 오오 내 사랑하는 아이다 내가 출세해서 그대를 하늘의 별로 올리고 옥좌에 앉히고 하고 염병천병을 떠는데 뭐 지가 파라오라도 되나 그냥 장군 주제에(...) 시작한지 15분도 안 돼서 암네리스 공주는 자기 노예 바라보는 라다메스 눈빛을 보고 둘 사이를 눈치깜. 근데 이건 뭐 거의 복사기도 아는 사내 연애 수준으로 티나는 거라.

 

사실 저는 개끌듯이 노예 둘셋을 질질 끌고 입장할 때부터 암네리스에게 압도적으로 빠졌습니다. 

대충 이런 분위기였음(람슈타인의 'Mein teil' 뮤비입니다)

초반에는 쫌 실망했습니다. 무대도 좀 난삽하고 화면 포커스도 만족스럽지 않고 독창으로 부르는 아리아는 아무래도 야외라서 그런지 실내 공연장에서처럼 압도적인 음압을 때려주지도 못하고. 거기다가 내용이래봤자

라다메스: 그렇게 소원하더니 에티오피아 전쟁에 출정함

암네리스와 아이다: 암네리스는 아이다의 비밀을 알아내려고(아니 뭐 근데 둘이 공개 연애 수준이고 어차피 아이다는 자기 수족이라 더 알아낼 것도 없지 않나) 얘 넌 내 노예 아님 넌 내 여동생이나 마찬가지야 아니 친구야 너도 공주였는데 힘들겠다 얘 이러는데 아이다는 쟈갑게 할말 없으요 암네리스는 이년 내가 요절을 내리라 너네 나라도 완전 망할 거임 이런 퐈이트 반복이라.

 

그래서 2막에서 이집트가 전투에서 이긴 후 무대가 저어기 제일 위에 올린 사진처럼 바뀌고 승전 행진에서 웅장한 합창과 승전 행진곡(이거 들으면 아 이거-하고 다 알 곡입니다) 때려 주니까 훨씬 낫더군요. 그리고 역시나 아이다하면 승전 행진 코끼리죠. 뮤지컬 한국 버전 아이다에서는 실물 코끼리 등장시키고 했는데 여기서는 겁나 큰 금색 코끼리가 멋져서 만족했습니다.

우리 코끼리의 멋짐을 봐주세여.

 

그 다음은 뭐 별 거 없어요. 파라오는 개선장군인 라다메스에게 오 내 딸 암네리스랑 결혼하렴 해서 둘은 날 잡고 암네리스만 웨딩드레스같은 거 입고 희희하는데 라다메스는 죽상이고(...) 아이다를 못 잊어서 둘이 밀회하기로 했는데 정작 아이다는 친아빠한테 낚여서 스파이질;하다가 라다메스랑 같이 망하고 쥬금. 아참 아이다는 끝까지 옷 한 벌로 버팀. 아무리 노예라고 해도 공주님 직속인데 흑흑.

뭐 좋다고 우리 공주님은 둘의 명복을 빌어주네요... 관대하시기도 해라...

 

일단 암네리스가 노래를 겁나 잘하고 포스가 철철 넘치기도 하지만 저는 이국에서 굴러들어와서 마음을 빼앗아가는 근본없는 그녀보다는 본국에서 착실히 노력하며 기득권을 쌓아온 그녀들한테 마음이 가는 편입니다. 샤르휘나보다는 레 마누아, 선덕여왕보다는 미실(아 드라마 기준요)  

 

근데 아무리 남의 사랑이라지만 라다메스랑 아이다 사랑은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 가네요. 둘이 처음부터 오오 사랑해요 갈겨서 그런가 나중에 막 절절하게 끌어안고 그래도 무감동 그자체. 아 김과장과 박대리는 사랑을 하는구나=_= 이런 기분?

 

결론: 무대 사용이나 감동은 같은 페스티벌의 '마술피리'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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