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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실직하는가 - (1)

이러다가, 올해 내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 재직기간 15년을 채워야 퇴직금 가산금이 붙는다는 것은 회사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티자고 15년까지 남은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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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의 500여개 되는 글을 연어처럼 거슬러가서, 첫 번째 글로 가봅시다. 이 글로 시작되는 제 첫 직장 실직과 구직급여 시리즈의 마지막 부분에는 2018년 당시 제가 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과에 일 주일 동안 입원했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 얘깁니다.

당시에 저는 험프티덤프티를 여러 모로 닮은 양반(제겐 아쉽게도, 이 양반은 아직 험프티덤프티처럼 담장 위에서 와장창 떨어지진 않은 모양입니다)과 2년 동안 지내면서 달걀독...아니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아서 마음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독은 험프티덤프티가 영전해서 눈 앞에서 없어져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져서 2017년 연말부터 슬슬 기미가 보이던 불면증이 2018년 1월부터는 단 한 잠도 자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개발살난다는 것을 2015년에 체득해서 알고 있었던지라 초기에 고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예전의 경험으로 뭘 어디서 시작하든 신경 정신과계열로 보내지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처음에 그간의 삶을 이실직고한 후 약물 치료를 주로 하게 되는데 증세가 호전이 없거나 더 심해졌음을 호소할 경우 초기에는 1주, 나중에는 2주 간격으로 약의 배합을 바꿔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약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발현하려면 짧게는 2주 이상이 걸린다는 것도 말이죠. 2015년의 기억은 너무나 쓰디썼고 이번에는 같은 결과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미리 스포하자면 이런 욕심도 회복을 더디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분당 서울대병원 정신과 외래 환자로 2015년 당시 처방전과 지갑, 핸드폰만 가지고 들렀던 저는 자의로 일주일간 병동에 입원하게 됩니다.(아, 물론 당시에 연초라 빈 병상이 있었고 지인 찬스를 썼던 것도 있습니다. 입원하고 싶다고 바로 입원할 수 있는 것도 또 아니여요)

입원하면 외래에 비해 여러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우선, 24시간 케어를 받게 되며 외래에 비해 입원 환자가 받을 수 있는 치료 약물 범위가 더 넓습니다. 또한 다면적인 심리/정신 종합 검사를 단기간에 받을 수 있으며 짧은 기간에 여러 번 처방을 바꿔 볼 수 있습니다(하지만 전면적인 수정이라기 보다는 조금씩 배합을 바꿔본다-에 가까운 듯 합니다) 이 장점에 집중해서 나머지는 신경쓰지 않았었는데요... '난 못 잘 뿐이지 환자가 아니니까'하는 나이브한 생각 때문이었어요. 환자 맞습니다.

담당의가 '폐쇄병동 갈 정도는 아니다'라고 판정을 해서 개방 병동에 가게 되었습니다. 지급된 환자복으로 환복하고 생활 수칙에 대해서 간단한 설명을 들었는데요, 병동 밖 외출은 허락을 받으면 가능하며(허락을 못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자살/자해 이슈 때문에 운동화의 신발끈은 모두 회수되었으며 이어폰도 밤에는 회수됩니다. 또한 병실 내 화장실/욕실은 동일한 이슈로 샤워기 줄이 매우 짧아서 머리 감기가 좀 불편합니다. 대체로 설명에 만족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처음에 이러저러한 안내를 받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심지어 너는 좆될 것이다 이것도 미리 알려주는 걸 좋아할 정도죠.

병동은 크고 깨끗하며 밝은 색 위주의 뭐랄까...좀 노인 고급 요양원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간이 헬스장에는 낙상 위험 때문에 속도가 1.5로 고정되어 있는 러닝 머신이 있고, 티비가 있는 휴게실, 각종 특별 활동실, 티룸, 그리고 여러 종류의 책이 있는 서가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하필이면 손에 걸려든 것이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었는데요...사흘 만에 다 읽었습니다. 내용이 혼파망인데다 희망이라고는 1도 없는 다쥬금 엔딩이라 당시의 정서에는 1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흡입력이 대단해서 내용에 진저리치면서도 읽기는 계속 읽었습니다. 대충 닥터 스쿠르 그런 거나 재탕할 걸 떼잉. 결국 같은 건물 내 도서실에서 가볍고 밝은 여행기 종류를 빌려 봤는데 지쳐서 긍가 눈에 별로 들어오진 않았습니다.

병실은 3인실이었구요, 건너 편의 분은 수술을 받은 후 호르몬 문제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30대 중반의 주부였습니다. 약을 여러번 바꿔 봐도 도저히 듣지 않아서 입원으로 결단을 내려고(...저는 이 마음에 매우 공감했습니다) 아이 둘을 시모에게 맡기는 강수를 두고 며칠 째 입원 중이어요. 다른 건너 편의 분은 말수가 기이할 정도로 적은 20대 여성이었는데 나중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같은 병실의 세 명 다 수면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부러 이렇게 배정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아마 그럴 듯요) 그러나 수면 관련해서 다양한 서적과 논문을 섭렵만 한-_- 프로 환자인 제가 의견을 내자면, 수면 장애에는 입면 장애, 수면 패턴 장애, 기면증, 하지 불안 등 다양한 증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건너편 환자는 입면 장애였고...
새벽 한 시 무렵,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며 눈을 감았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눈을 떠 보니 길다란 머리의 형체가 바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_-;;; 넵, 다른 건너편 20대 여성은 수면보행증(몽유병) 환자였던 겁니다. 가까스로 비명을 누르고 간호사에게 얘기해서 분리 조치되었지만 그날 잠이야 다 잤죠. 뭐. 참고로 수면제는 밤 약에 1/2가 처방되고, 두 시 경에 입면에 여전히 문제가 있음을 호소하면 추가 1/2가 제공됩니다.

수면 장애라는 게, 뭐 딱히 겉으로 티가 나거나 하는 것도 아니고 피지컬적인 면에서 낮의 현기증이나 낙상(어허허....)만 조심하면 되는 거라 낮엔 소원대로 꽤 바빴습니다. 일 2회 회진, 병동 밖에서 하는 인지능력검사, 로르샤흐 테스트, 그림 심리 검사, 심리상담, 수면위생치료(이 때 '잠은 나쁜 남자라서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와요'라는 희대의 명언을 듣게 됩니다)등등을 받았구요, 이 결과들은 체계적으로 정리된 100쪽 가까운 진료기록으로 남습니다. 이걸 공식 요청으로 퇴원 시 받아서 이후 치료에 다른 쓰앵님들 참고하라고 유용하게 써먹었습니다. 아, 그리고 다른 환자들과의 티타임이라거나 스트레칭 GX에도 몇 번 나갔었군요. 나중에 청구는 되는데 합리적인 가격이라 그닥 불평은 없음.

티타임에서 들은 얘기 중 제일 뿜겼던 건 '여기 밥은 특급 호텔만해요'라는 거였습니다. 근데 실제로 한화 리조트 밥 정도 되었으며 뒤에 나올 종합병원 절망편에 비하면 정말정말정말 선녀같은 밥이었습니다. 병원밥에 윤기가 흐른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그땐 몰랐지...(먼산)

아, 맞다. 그리고 *최*고*존*엄*스*타*벅*스*. 병원 2층에 꽤 넓은 스타벅스가 입점해 있습니다. 제아무리 평소엔 유대계 앞잡이니 아메리카노 맛이 별로니 씹었어도 병원 환경에서 스타벅스라니 정말 눈물나는 사제 맛. 이틀에 한번은 갔던 것 같네요.

간호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잘 짜여진 체계 하에서 원활하고 문제없이 굴러가서 간호 자체를 인식도 못하고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인계도 확실했고요(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4년 반 후 알게 됩니다).

단, 일주일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하고 퇴원했습니다. 여전히 저는 수면제를 정량으로 먹고도 한 잠도 자지 못했어요(정확하게 말하자면 4시간에 수백번 깨는 상태). 정신과 질환이라는 게 오래 동안 진행되어 오던 원인 사건이 심화되어 나타나는 건데, 뭐 드라마틱한 효과가 단기간에 나타나긴 힘들죠. 그래도 그 혹시나,하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었던 게 저도, 그리고 건너편 두 아이의 엄마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저는 4개월간의 병가를 내고(정확하게 말하면 4주 병가의 4회 연장) 회사로 복귀하였으나 증세는 더 나빠져갔고, 결국 이로 인해 파생된 장기의 종양 제거 수술을 마치고 일어나다가 기절해서 응급실에 실려갑니다. 거기서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 에라이하고 Decision to leave를 해서 첫번째 회사를 퇴사합니다.
...그리고 4년 4개월 후, 불면증으로 인한 현기증 관련 사고로 또다른 종합병원의 신세를 지게 됩니다. 이쪽은 좋게 말하면 현실편, 제 승질대로라면 절망편이겠네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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