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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단편적인 생각을 번호 붙여서 써 보겠습니다. 물론 스포일러 대량 함유.
0. 제가 양조위의 팬이 처음 된 게 90년대 극초반 의천도룡기 86을 봤을 때였어요. 물론 사조영웅문-신조협려-의천도룡기 중에서 제가 제일 정이 덜 가고 싫어하기까지 하는 게 양조위가 분한 장무기 캐릭터입니다. 네 명의 여캐 사이를 갈팡질팡하며 결국 넷을 다 마누라로 얻어들이는 꿈을 꾸는 게 당시 강직했던-_- 소녀인 제게 먹힐 리가 없었...는데 어라? 뭔가 유약해 보이면서도 사슴같은 눈망울에 볼 수록 개연성이 느껴지는 이 장무기는? 촬영 당시 20대 중반이라 매우 어여쁘던 양조위는 제게 그렇게 마음속에 들어와 박혔습니다.

1. 그 중간에 섭렵했던 영화나 tv 시리즈를 다 말한다면 밤을 다 샌다 해도 모자라겠으나; 암튼 그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1년 일대종사였고 그 후로도 한참 세월이 흘렀죠. 샹치로 한국 네티즌 일각이 다 뒤집어지고 수군거릴 때도 캡처를 보면서 흐르는 세월의 야속함에 약간 눈물 지은 것도 사실입니다. 흑 아기사슴 밤비가 나이가 드러써...ㅠㅠ

1-1. 근데요, 물론 분장의 힘도 있겠지만 샹치 안에서 양조위는 천 년 동안 나이를 더 먹지 않는 중년의 외모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 초반에서 천 년 만에 첫 사랑에 빠져서 정신 못 차려서 급 회춘하고 설레는 그, 결혼해서 아이를 갖고 평범한 가정 안에서 행복해하는 그는 훨씬 실제보다 젊어보입니다. 20년이 흘러서 원념만 남고 권태가 흐르는 그는 배우 제 나이대로 보이고요.

2. 저 메인 이미지의 그는 신비로운 아바타 마을의...아니 탈로 마을의 여인과 처음 만나서 불꽃 플러팅을 할 때의 모습입니다. 남녀(혹은 남남, 여여)가 무공 대결을 빙자하여 플러팅하는 것은 무협지의 유구한 전통이라 하겠습니다.

3. 무협지하니까 떠오르는 건데 양조위의 무공은 극강의 파괴력을 가진 열 개의 링을 직선의 도구처럼 내려꽂으며 쓰는 양강(陽强)의 무공입니다. 샹치 모친, 그리고 샹치 이모님 등 탈로 마을 계열은 극도로 음유(陰柳)한 무공이구요. 샹치의 무공도 아주 어릴 때 모친에게 가르침받을 땐 음유했다가 모친을 잃고 아버지의 텐링즈에게 사육;될 때는 극도의 양강으로 갔다가 이모에게 사사받고는 음유 무공으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지지 않게' 되죠. (그러고 나서도 쳐발린 건 멘탈이 약해서...녜...) 여기서 양조위의 이미지와 양강 무공?하고 갸웃하다가 피지컬을 연기력과 템빨로 밀어붙이는 오빠를 보면서 납득하게 됩니다. 그래... 오빠가 동년배 홍콩 배우들 중에선 그리 무술 연기 잘 하는 편이 못 되니까 섬세한 무공 연기보단 저런 게 나을 수도 있어....(팬입니다 녜)

4. 샹치 가족은 뭐랄까, 해체된 현대 가족을 상징하는 건지 죄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샹치 역의 시무 리우 배우는 하얼빈성, 그러니까 동북 끄트머리 출신 답게 파워 북방계로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웬우 역의 양조위는 광둥성이라 파워 남방계고, 둘은 체격이나 외모나 닮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친을 닮았냐.. 모친 역의 진법랍은 서장, 그니까 서쪽 끄트머리 분이고, 자매 역의 양자경은 홍콩보다 훠어얼씬 남쪽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혼란해요. 딸이 모친의 이목구비를 닮은 게 있긴 한데, 모친을 떠올리게 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물론 양자경이 샹치를 보면서 '어머니를 닮았구나'할 때 들었던 내적 폭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만.

5. 영화는 CG가 덜하고 샹치 패밀리가 무공을 펼칠 때는 꽤 재밌습니다. 그런데 벽장이 열리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오자 갑분 디워가 되면서 그간 쌓아온 서사가 갑자기 허무해져 버립니다. 매력적 여캐들, 탈로 마을의 궁수 캐릭터들, 텐 링즈의 연합 그 모든 게 갑자기 허무해져 버리면서 영혼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졸개들한테 쏙쏙 빨아먹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텐 링즈를 장착한 수퍼 히어로만이 이 난국에서 구원해 줄 해결책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괜히 어벤저스 시리즈가 아니었어-_- 결국은 쿠키를 위한 빌드업이 되어버립니다.

6. 사실 양조위의 웬 우는 상당히 이중적입니다. 아내가 죽어버린 후 복수에 정줄을 놓고 무감각하고 잔인해져 버린 아버지로서의 그는 아들이 대립하고 뛰어넘어야 할 가부장제의 아버지이지만요, 죽은 배우자를 놓지 못하고 매달리며 결국 큰 사고를 쳐버려서 아이들에게 '걸리적거리고 민폐이지만 구해야 할 히로인'인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대충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찐 빌런이고 양조위는 진 히로인(히어로 아님)이라는 얘기-

7. 솔직히 저도 중간에 양조위가 보이스 피싱에 당할 땐 좀 짜증나더라구요. 근데 이게 성공하는 보이스피싱의 모든 공식을 따르고 있는 거 아니겠음?
- 노인층을 공략한다
- 자아가 강해서 '내가 하는 게 틀릴 리가 없다'라고 믿는 성격을 고름
- 본인이 가장 욕망하는 것을 가지고 유혹함(보통 사람들은 돈이지만 양조위는 망한 사랑;)
- 감정적인 메시지를 긴급하게 보내서 정상적인 판단을 흐림
...그러니까 천년 살아오면서 의심많은 우리 웬우 영감님이 선산 문서...아니 텐 링즈를 들고 홀랑 넘어가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녜...

8. 사실 데우스 웅앵이 웬우를 빨아먹고 본격적으로 패악을 부릴 때부터 디워가 시작되었고 그의 마지막의 서사까지는 온전하였습니다. 특히나 최후의 최후, 울망울망하는 눈빛으로 샹치를 바라보며 자신의 목숨보다 더 애착하는 텐링즈를 넘겨주는 것을 보며 그간의 노망...아니 뭐 암튼 그 모든 것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모두 치유되었습니다.

9. 갑자기 웬 랑종이냐고 하겠는데 22:43부터 보면 압니다. 바얀 신처럼 웬우 애비도 참 융통성이 없어요. 아들 샹치가 영 텐링즈 못해먹을 거 같고 복수도 적성에 안 맞을 거 같은데 옆에서 저요저요 하는 딸네미도 좀 봐줘야지 떼잉...

10. 네...양조위 얘기밖에 없었네요 저도 압니다... 이만 끝... 이번에 양조위가 덕후몰이 한 김에 녹정기 드라마도 어디서 틀어주면 참 좋겠네여..

덧. 양조위 클로즈업할 때마다 화양연화 st. 느리고 애절한 클래식 비쥐엠 나오는 거 저만 뿜었나요... 여전히 총애받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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