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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루시 아이젠버그

번역: 강혜정

국내 출간: 2019.4.8

제게 대체로 미국 역사에 대한 인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영국으로의 독립 이후로 300년이긴 합니다. 그걸 또 영국 식민지 이주 이후부터인 400년이라고 탈탈 털어서 착즙하는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근데 인디언들은 역사 안중에도 없냐 역시 재수없어 이렇게 귀결되곤 하죠. 이 책 고른 이유는 요즘 디지털 난독증이 좀 완화되고 있어서 800페이지짜리 양장본도 읽을 만하고, 결정적으로는,

https://twitter.com/2nd_rate/status/1104390167022821376

암울한 몇 달간 삶의 낙이 되어주셨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쓰레드 덕이 큽니다. 제가 이 분 아니었으면 카펫베거(남북 전쟁 후에 남부에 한탕 하러 온 북부 하층민들 멸칭. 집에 가진 게 카펫밖에 없어서 그거 둘러매고 남부까지 겨들어왔다는 소리죠)나 스캘러왝(북부 공화당에 협력하는 남부 하층민들 역시나 멸칭)같은 말을 어떻게 알았겠어요.

하여 읽고 메모겸 남깁니다.

원래 저는 이 책 한글 제목만 읽고 덥썩 고르면서 대체로 미국 동부 WASP를 중심으로 한 지배가문과 핵심계층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기대했었습니다. 빌려오고 나서 원서 제목인 'WHITE TRASH'은 그 반대-소위 '백인 쓰레기', 백인 하류 계층인 걸 보고 에이 번역이 뭐 이래 하고 투덜거렸는데 다 읽고 나니 재미는 없지만 대체로 맞는 번역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 하면 이 책은 미국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지배계층과 그에 동조하는 중산층이 바라보는 '객체로서의' 하류 계층에 대해 다룬 글이거든요. 따라서 각각의 시대에서 지배 계층의 출신과 배경, 지배관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상인 하류 계층보다 더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400년 미국 역사에서 하류 계층은 긴 세월 동안 의도적으로 '없는 것'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의 특수성 및 정치공학적 이점에도 기인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실은 이주민 중에서 청교도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신대륙에 정착한 근면하고 성실하고 우수한 인종은 계급이 없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신화에서 나태 음란 등등의 신대륙에 정반대되는 특질을 보이는 백인 하류 계층은 서울올림픽 개최 당시 판자촌처럼 있으나 없는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고 아주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 터, 수백년동안 그들의 외모, 행동, 주거 등등의 거슬리는 특징을 비하하는 멸칭은 수도 없이 존재해 왔습니다.(평범하긴 한데 그 중에 제 마음을 제일 두드린 건 Clay-eater ;;; 백년간의 고독에서 흙먹는 묘사를 너무 생생하게 봐서 그런가;) 그러나 이들은 나름의 이용가치가 있어서 선동되고, 이용되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자본주의 끝판왕답게 백인 하류계층의 조야함을 대중문화로 섹시하게 구현해서 팔아먹기도 해 왔구요.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장 순서대로 기억나는 거 몇개 말해봅시다.

제1장 쓰레기 치우기: 신세계의 폐기물 인간

17세기 영국에서 골칫거리는 청교도들(실제 미국 초기 이주민들 중 청교도 비중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보다는 하류 계층의 잉여 현상이었습니다. 이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네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로 기근이나 질병 등등으로 자연사하는 게 있었고 둘째로 범죄를 저질러 사형당하는 게 있었고 셋째로 해외 전쟁에 보내버리는 게 있었고 넷째로는...해외 식민지에 이주시키는 거였어요. 식민지 경쟁이 본격화된 17세기부터 네번째 방법이 선호되었죠.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꿈과 희망을 담아 보냅니다. 여기서도 미국-신대륙은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처녀 포카혼타스 쯤으로 묘사되었고 구대륙은 신랑으로 묘사되었죠(여기서 야무지게 배운 일본이 내선일체를 결혼으로 미화시킵니다;) 실제로는 정착에 실패해서 굶어죽을 뻔한 땅그지 백인들을 가엾게 여긴 원주민들이 먹을 것 줘서 살려 놓은 거지만 그들은 곧...(중략)

제2장 존 로크의 느림보 나라: 캐롤라이나와 조지아 정착지

존 로크의 실용주의적 철학 기저에 깔린 철저한 계급주의와 인민주의 통치철학 아래 식민지는 지역적 특성과 지방 행정가에 따라 다르게 발전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는 늪지대 때문에 진즉 땅그지들이었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노예 노동을 쓰는 대농장주 사회였고 일찌감치 백인 하류계층은 불하받은 빈약한 땅을 담보잡히거나 팔아치워서 소작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꼴을 보고 잉글소프라는 조지아 행정가는 조지아 내에서는 노예노동을 금지하고 토지 불하에 상한선을 지정하는 등 건전한 농민 계층을 육성하려고 했습니다. 뭐 딱히 잉글소프가 하류층을 이뻐해서가 아니라 적정한 인구와 경제 기반을 갖춘 하류계층은 백인 지배계층과 흑인 노예의 완충 지대를 해 주거든요.

그러나 싸고 말 잘 듣는 노예를 부려서 부를 증식하고 싶은 농장주들의 생명의 위험을 받아 잉글소프 선생님은 도망갔고 조지아는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능가하는 노예제 대농장제가 되었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월드가 된 거죠.

제3장 벤저민 프랭클린의 미국종: 중간층 인구통계

인종주의보다 더 재밌었던 건 프랭클린 뒷 얘기였습니다. 누구든 노력하면 자신처럼 신대륙의 성공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은 그 성공신화에는 그를 믿어주고 선뜻 후원해주는 상류계층 지인이 있었다거나 하는 요즘에도 흔한 얘기죠.

제4장 토머스 제퍼슨의 폐물: 특이한 계급 지형학

토머스 제퍼슨은 자신의 정체성을 농부라고 하긴 하지만 본업이 아니라 신사 소일거리로서의 취미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먹고 살기에 급급한 하류 계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죠.

이 양반 철학 중에서 좀 주목할 게 1/8 이론인데... 유색인종 피가 1/8까지 옅어지면 건전하고 우수한 미국 신인류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이론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쿼터 노예와 1/8 섞인 사생아를 왕성히 생산하셨고...

제5장 앤드루 잭슨의 크래커 나라: 보통 사람으로서 무단토지점유자

이제 19세기 초에 미국은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합니다. 미국 서부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불렸는데 잉여 하류 계층을 방출하는 면에서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단으로 토지를 점유해서 변변찮은 농사를 이어갔습니다.

여기서 잠깐, 영국에서 넘어온 하류 계층들이 토지 불하라던가 초기 자본 등 구조적인 불평등도 있지만 일 안 하면 개죽음당하는 노예들은 차치하고 독일계 이민자들보다 훨씬 생산성이 떨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연구가 있었습니다. 대부분 농민들인 독일계에 비해 기술자 장인들인 영국인이 터프한 농지에 적응을 못했다거나 그 때부터 복지에 쩔어서 무력해졌다거나... 어쨌든 첫 단추를 잘못 꿰면서 빈곤은 대물림됩니다.

제6장 가계도와 가난한 백인 쓰레기: 나쁜 피, 잡종, 클레이이터

몇 세대가 거듭되면서 백인 하류계층은 고착화되었고 그들의 좋지 않은 특성에 대한 비난도 다양해졌습니다. 누렇게 뜬 혈색없는 흰 피부, 왜소한 몸, 바랜 머리칼 등등 신체적인 특징부터 게으름, 무기력함, 음란함 등 정신적인 특징까지 죄다 비난의 대상이었죠.

제7장 겁쟁이, 비겁자, 머드실: 계급 전쟁으로서 남북전쟁

남북전쟁에서 아까 언급했던 미국 종특인 ‘계급 지우기’와 정치공학 종특인 ‘우리와 그들 편가르기’는 꽃을 피웁니다. 북쪽 입장에서는 우리는 미국 독립의 고귀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미국종이고 남부는 구대륙의 뒤떨어진 계급주의를 고수하는 퇴물인 거죠. 남부 입장에서야 우리는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투쟁하는 거고 북부는 물질주의의 천박한 괴물인 거고.

이 이념전쟁에서 일반 병사로 내몰린 건 북쪽이나 남쪽이나 다 하류계층이었고, 전쟁이 끝나도 별다른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잊혀졌습니다. 이 계층의 초상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아치죠. 아내를 죽여서 감옥에 들어갔다가 전쟁에 끌려가서 부상을 당해서 돌아오는데, 그를 전쟁으로 내몬 남부 지도층보다는 북부인들, 여성, 흑인을 증오합니다.

이건 남부빠인 미첼 생각이고, 실제 하류 계층들은 부지런히 탈영하고 댕기는 지각이 살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전후의 북부 카펫배거나 남부 스캘러왝도 지배층의 지탄과 달리 자기 계급의 이익을 취했을 뿐이죠.

제8장 순종과 스캘러왜그: 우생학 시대의 혈통과 잡종

20세기 초가 됩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도에 넘친 경제적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벼락출세하면 제일 먼저 하는 게 호적에 금칠하는 거잖습니까. 얘들은 자기 선대 조상을 정복왕 윌리엄까지 갖다붙이면서 경제적 성공을 고귀한 혈통 때문이었다고 포장합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하류 계층의 경제적 열등함은 조상들이 내려준 열등한 유전자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튀고, 당시 쓰잘데기없이 발전한 우생학과 결합해서 미래의 하류인생들을 없애고자 격리 불임조치를 시행합니다. 뭐 당시야 지체/지적장애인 불임이야 전세계 어디든 있었는데 정상 살짝 경계선, 그러니까 노둔(moron)한 사람들까지 죄다 판결로 불임시술을 했어요. 그 중엔 생후 7개월된 아기도 있었습니다.

끔찍한 시대입니다.

제9장 잊힌 남자와 가난뱅이들: 하향 이동과 대공황

역설적으로 대공황시대가 미국 400년사 중에서 계층 이동과 성공 실패에 대해 개인의 노력을 탓하지 않는 유일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대공황 후에는 다시 잊어버렸죠.

제10장 촌뜨기 숭배: 엘비스 프레슬리, 앤디 그리피스,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제11장 레드넥 뿌리: <서바이벌 게임>, 빌리 맥주, 태미 페이
제12장 레드넥 정체성 선언: 슬러밍, 뺀질이 윌리, 세라 페일린

점점 쓰기 귀찮아져서...2차세계대전 이후는 하나로 묶습니다. 케네디 이후의 좀 인기없는 대통령; 존슨은 미국 촌뜨기, 직설적으로 말하고 거친 지방민의 특징을 가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면에서 미국 하류계층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최초의 대통령은 빌 클린턴이에요. 하류층 출신이라는 것부터 저질 식습관, 섹소폰 취미, 성적 매력까지 하층 계급의 모든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오바마보다 더 흑인같다고...

성적 매력하니까 엘비스 프레슬리, 티나 페이, 돌리 파튼 등 너무 성적으로 노골적이라 음란해보이는 대중문화 아이콘들 특질이 다 백인 하류계층에서 보기 좋게 가공한 겁니다. 결국 팔아먹기 좋게 예쁘게 가공한 걸(돌리 파튼 명언이 ‘이렇게 싸구려같이 보이려면 얼마나 돈이 들어가는줄 아세요?’) 중상류 도락으로 남기고 하류 계층은 계속 멸시의 대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두꺼운 교양서치고 가독성이 상당히 좋아서도 있구요.. 선진국의 양태는 언젠가는 이곳으로 넘어올 거라고 생각해서도 있습니다. 린든 존슨 대통령 이 말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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