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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심하게 병 때문에 고생하기 전(사실 뭐 그때도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아픈 적도 없었습니다;)과 알바 시작하기 전의 백수 생활, 그리고 현재 병과 함께 하는 동거 생활과 차이는 '마음 가는 대로 해도 거칠 것이 없다->정해 놓은 바운더리 내에서 조심하면서 살아도 된다->마음 가는 대로 하면 애로사항이 많다' 정도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무척 좋아하는 커피를 예를 들어보자면, 예전에 구회사 시절에는 대체로 일에 쩔은 현대인이 그러하듯이 아침과 점심에 커피 한 잔씩 각각 마셨어요. 그러다 불면 때문에 커피를 못 마시니 더 몸이 축축 늘어지더라구요. 마지막 다녔던 수면 클리닉에서 새벽에 한 샷 정도는 괜찮다고 했을 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수면 문제가 깔끔해지고 종양 쪽도 관찰 정도 될 시절, 알바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다시 아침에 커피 한 잔, 그리고 도저히 졸려서 일이 안 되겠다 싶으면 점심에 1/2 디카페인 커피 정도 먹으면 괜찮았습니다. 사실 그 때는 건강 전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균형이 잡혀져 있을 시절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숏 사이즈로 줄이고, 1/2로 조절하는 정도였지 양과 타이밍에 대해서 일일이 따지거나 고민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커피고 술이고 끊은지 대략 한 달 열흘 되어갑니다. 전반적인 먹고 마실 거리에 대한 흥미가 줄기도 했고, 지금 복용하는 약과 술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아서 술이 아주 먹고싶은 건 아니에요. 커피는 좀 다릅니다. 요즘 제가 체력 떨어져서 아침엔 거의 시체 상태거든요. 그 때 커피가 들어가면 그나마 반 시체상태라도 될 텐데 싶은 거예요. 근데 이번 의사 선생님은 카페인 자체는 일체 먹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단 말이죠...뭐 2년전에 그나마 치료 마무리였던 시절하고 지금 제 상태가 다르고, 치료 방침도 다르실 테니 어쩔 수 없죠.

한국의 카페에서 카페인이 없는 음료는 의외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커피 맛은 좀 의심스럽지만 디카페인과 1/2 카페인 옵션에 있어서는 한없이 관대한 스타벅스는 요즘 코로나 문제 때문에 거리낌없이 가기엔 또 문제가 있죠. 제 체력으로 갈 수 있는 데가 도서관하고 카페 정도인데 둘 다 요즘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지인이 선물해 준 디카페인 드립백을 꺼냈다는 얘깁니다. 그나마 제가 지금 상태보다 나을 시절에 전국구 네임드 카페 모모스에서 만났던 지인은 '한 시간 이상 앉아 있기도 힘들다'는 제 상태에 대해 '코로나 부산 47번 환자(코로나에서 회복된 모 교수님이신데, 그 후유증에 대해 눈물겨운 후기를 남기셨습니다)인가요' 라는 드립을 날린 후 선물로 이걸 줬어요.

뒷면은 이렇습니다.

요즘 기술 좋아졌어요. 예전에 디카페인은 무슨 담뱃재맛 비슷한 게 났는데 지금은 블라인드 테스트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디카페인 커피도 선뜻 손이 가는 건 아닙니다. 원래 카페인의 5~10% 정도는 남아서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한 동안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어제 수면에 좋다는 건 다 착실하게 루틴대로 하고도 잠을 설치니까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아침에 한 잔 한 거죠.

커피, 그 중에서도 카페인만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압니다. 바닥을 달리는 체력, 이명과 두통으로 한계에 부딪쳐서 거의 포기한 지적 활동, 그 외에도 할 수 없게 된 많은 일들이 카페인으로 물화가 된 거죠. 디카페인 커피 먹었다고 무슨 해결이 되겠어요. 그래도 이거 하나로 끝은 아니니까 또 견디고 계속 흘러갑니다.

덧.TWG의 디카페인 블랙 티는 한밤중에 마시는 차라는 컨셉 답게 훨씬 순하고 깔끔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침에 마시는 그 커피가 좋은가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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