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 제목 : 경성의 주택지-인구 폭증 시대 경성의 주택지 개발(포스팅 제목은 어그로입니다 녜;)
- 정암총서 12(건축 역사 시리즈예요)
- 지은이 : 이경아
- 출판사 : 도서출판 집
- 출간일 : 2019년 11월
- 장르 : 건축이론/비평/역사 또는 전통 건축


올해 6월 말일, 저의 최애 서점 기장 힐튼 호텔 1층(아니 B1층이었나 B2층이었나...거긴 층수 개념이 영 헷갈린단 말이죠;;;)에 위치한 'eternal journey'에서 돌아다니다 꽂힌 책입니다. 이 서점의 장점 중 하나는 책 전시인데요, 굳이 최신 서적과 베스트셀러에 집중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취향에 맞춘 책 전시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서점에서 놓쳤던 책을 여기서 발견하는 (지한테나) '숨은 보석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원체 수박겉핥기식으로 아주 라이트하게 건축에 흥미가 있고, 서울과 서울의 역사를 좋아합니다.(이제 서울에 살지도 않는데 왜 좋아하냐고 물으신다면... 멀어졌기에 더욱 완전하게 사랑할수도 있는 법이죠-_- 저의 히치콕 할배가 런던에 살면서 뉴욕의 지도를 완벽하게 외웠던 것처럼요;ㅁ;)
지금으로부터 약 100여년전 일제시대, 효율적인 식민지화를 위한 경성 집중 개발로 인구 수가 100만명에 육박할 정도로 경성의 밀집도가 심해지고 주택난이 심각해집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업자는 (적당히 총독부 및 경성부윤과 결탁해서) 대규모 필지를 사들여서 민간에 분양합니다. 당시 주택은 관사, 사택, 문화주택, 한옥주택, 아파트, 영단주택, 부영주택 등으로 계층과 직업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고 점점 더 개발될 수록 경성은 4대문을 벗어나 저 멀리 안암과 흑석동까지 확장됩니다. 개발업자들이 매력적인 브랜드 네이밍을 해 신문 잡지에 광고하고 분양 팸플릿을 배포하고 기자 설명회 등을 열어 이상향으로 선전하는 건 현대와 매우 흡사합니다. 그리고 모델하우스와 박람회, 현실로 이뤄진 완벽한 주택단지 이면에는 일방적인 철거로 쫓겨나가서 인근 산에 빈민촌을 짓고 극단의 대비를 이루는 원주민들이 있다는 점도 비슷하죠. 일제 막판-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패전 직전에는 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재개발을 수행했습니다. 일본 내지에서야 주택재개발조합 눈치도 봐야 되고 챙겨야 될 인권도 있지만 식민지에선 밀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심시티하기엔 최고의 조건이었고 일본인 건축가들의 꿈과 이상을 펼치기에도 차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그 시절 각광받았던 서울 열 두 곳의 동네를 하나하나씩 펼쳐보이면서 그곳의 주택개발 역사와 특징, 그리고 주도적인 인물과 시사점에 대해 논합니다. 현재 부동산의 이슈도 특정 지구별로 논해진다는 면에서 무척 흥미로운 방법론입니다. 저도 각 챕터별로 기억에 남았던 점에 대해 메모식으로 남기려고 합니다.

1. 우리나라의 대표 한옥단지, 가회동과 건축왕 정세권
북촌에는 조선인이 살고, 남촌에는 일본인이 살았다고도 하죠. 가회동은 한옥촌으로 유명한데 여기 한옥은 대부분 일제 시대에 집단적으로 조성된 단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인 개발업자 중 가장 유명한(...그리고 양심적인 축에 들었던;) '건축왕' 정세권은 한옥의 건축비가 양옥에 비해 매우 저렴하고 조선인들의 한옥 수요가 높다는 점에 주목해서 가회동 등 서울의 여러 요지에 개량 한옥을 공급합니다. 중정식(ㄷ자나 ㄱ자식으로 중간에 마당이 있는 전통 가옥 양식)보다 중당식(생활공간을 집약시키고 마당을 바깥으로 뺀 형태)이 위생과 편리함에서 월등함을 깨달았지만, 대중의 수요가 여전히 중정식에 있음을 알고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킨 개량 주택을 계속해서 공급합니다.
이 분이 일세의 난 분이라고 생각된 게, 노인이 되고 현역에서 은퇴한지 한참 된 60년대에 이미 '미래에는 핵가족이 대세를 이루어서 중소형이 대세가 될 것이다'를 내다보셨다는 겁니다. 암요.

2.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촌의 서양식 주택
북촌에도 서양식 주택이 있었습니다. 조선인 중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분들이 선호한 주택이 양식과 화식(일본식)을 절충한 '문화주택'입니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분들의 주거 생활이 실은 양식과 화식 뿐 아니라 조선식의 온돌도 버리지 못한 삼중 생활이었다는 거죠; 아참 그리고 문화주택에 대한 당시 대중의 동경과 열기를 보여주는 당시 기사에서 신여성에 대한 여성혐오가 고스란히 배어있던 게 웃겼습니다. 신식 집 사주면 정신 못 차리고 달려들고 사기당하고 그런다 이거죠(...)

3. 서울의 중심, 인사동 일대의 변화와 박길룡의 조선주택 계량운동
이 장이 제일 재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택 개량에 대한 전문적인 내용이거든요. 딱 하나 기억나는 건 인사동에는 '한양의 중심이다' 공인 표지판이 있습니다. 끗.

4.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삼청동 주택지와 김종량의 하이브리드 실험주택
저는 원래 삼청동 갈 때마다 헉헉거리며 '이건 뭐 회사 야유회나 와야 될 것 같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이 무슨 집들이 빼곡하게...'라고 느꼈었습니다. 알고 보니 원래 집도 거의 없고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위락지였는데 어느 사짜가 관하고 결탁해서 삼청동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려서 주택지로 개발을 했다더군요;;; 그러다가 원주민 분도 다치고...아이고.

5. 이상적 건강주택지, 후암동
조선인에게 가회동이 있다면 일본인에게는 후암동이 있습니다. 남촌을 점거했지만 알고 보니 건강에 별로였다는 걸 깨달은 일본인들은 볕 잘 들고 널찍한 후암동에 고급 단지를 짓고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쯧쯧쯧 나약한 일본인들;;;; 아 그리고 앞으로 마르고 닳도록 나오는 경성 대표 주택 3단지 중 하나가 여기 있습니다. 후암동의 학강 주택지, 장충동의 소화원, 충정로의 금화장. (주택인데 '원' '장'을 붙이는 건 요즘 아파트 단지에서 '파크' '팰리스'를 붙이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있어보이려고)

6. 한양도성의 훼절과 고급 교외 주택지 개발, 장충동
장충동은 원래 금위영 관리 지역이라 도성 안에 있으면서도 매우 한산한 곳이었습니다만 교통이 편리하고 공지가 넓은 곳을 일제가 가만 두겠습니까. 일단 한양도성 헐고 조선 말에 항일 인사들 추모하겠다고 만들어 놓은 장충단(홍계훈이 항일인사라기 보다는 하필이면 자기 일이 일본에 맞서는 거라 죽은 거지만;)을 공원으로 바꿔버리고 유곽과 요정을 들입니다. 여기서 제일 투명한 유리구슬 같았던 건 경복궁에 있던 세자의 집무실을 헐어다가 일본식 요정을 세운 것;;;(참 얘네들은 꼼꼼하게 엿먹이는 짓을 잘 한단 말이야;;;) 그리고 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바로 알아듣는 개발빌런; 동양척식회사의 자회사가 초고급 주택 단지를 개발해서 분양합니다.
제가 어그로를 끌었던 '이건희 회장 집은 왜 장충동에 있었는가'는 간단합니다. 일제 시대때부터 여기는 초상류층 살던 데였습니다. 그러니 해방 후에 이회장이 터를 잡았겠죠.

7. 그들의 전원주택지, 신당동
장충동에서 시구문으로 한양성곽 경계를 넘어가면 도성 밖에 공동묘지 겸 빈민촌인 신당동이 있었습니다...만, 성곽이 헐리고 교통이 뚫리니 이제 도심에서 매우 가깝고 재개발하기 용이한 동네가 된 셈입니다. 공동묘지는 옮기고 빈민촌은 허물어서 일본인 위주의 고급 전원주택단지를 만듭니다.

8. 경성의 학교촌과 조선인의 문화촌, 동숭동과 혜화동
성균관과 반촌이 있어 학문적 역사는 탄탄했지만 궁궐과 너무 가까워서 개발이 거의 되지 못했던(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개발이 덜 되어 있었다->호재로구나!이런 흐름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대학로 일대는 일제 시대가 되면서 궁궐도 무너진 판에 경성제대를 위시한 여러 학교가 들어오면서 학교촌과 문화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9. 한양도성 밖 첫 한옥 신도시, 돈암지구
제 입장에서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얘기였는데요; 한성대 안암 일대가 돈암지구로 해서 최초의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도시계획 하에 한옥 신도시가 되었다는 겁니다. 넓고 교통이 편리하고...에서 으응? 교통이 편리? 아참 이때 중심은 혼마치였지...마치 이것은 강남과 판교같은 거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좀 웃겼던 것은 이 때도 중산층 핵가족 조선인 월급쟁이들을 타겟으로 광고도 하고 활발한 마케팅을 했는데요, 그 광고 중 하나가 '남편들은 같은 직장 동료이고 서로 친밀한 젊은 부부 두 쌍이 있다. 한 커플은 돈암신도시로 집을 사서 이사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데 경성 안에서 셋집에 남아있던 나머지 커플은 아내가 병들고 남편은 알콜중독이 된다' ....이뭐병... 역시 부동산 마케팅에서 어그로와 공포 마케팅은 역사가 깊습니다.

10. 한강 너머의 이상향, 흑석동 그리고 토지 투기의 확산
일제시대에 한강 다리가 놓이면서 대경성권, 강북과 경성 밖의 강남은 교통이 매우 개선되었습니다. 한강을 운치있게 조망할 수 있어서 조선시대부터 권문세가의 별장으로 사랑받았던 흑석동은 장노년 일본인들의 고급 단지로 개발되었는데 일제 중후반이 되면서 조선인들 주택 수요가 폭발하니께 돈이면 다 하는 일본인 개발업자는 한옥도 엄청 지어 팔고 내선일체라고 막 갖다붙였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당시 붙여졌던 '명수대'에 거부감이 없이 아직도 지역명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얘기.

11. 최신 주거문화의 전시장, 충정로
사실 전 목차 볼 때부터 충정로에 완전 꽂혀 있었습니다. 이 책의 독서 과정은 충정로까지 가는 무한한 여정(...) 이 책에 나오는 열두 동네 중에서 제가 유일하게 살아 본 곳이고, 제가 사랑하는 서대문-마포 서울 서쪽 권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서울의 서쪽 권역은 한양 시절부터 중국과의 지리적 위치 및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무게 중심이 실린 곳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아까 외우라고 했던 경성의 3대 주택지 중 하나, 금화장이 위치한 곳이 되어버렸고 또 원주민 조선인은 쓸려나갔습니다(...)
아참, 아파트 얘기가 꽤나 자세하게 나옵니다. 지금은 유튜브에서 괴건물 쯤으로 취급받는 '충정아파트'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파트 중 하나거든요. 회계사회 오가면서 어머 저 오래된 건물 무서운데 포스있다;라고 주목했던 그곳의 역사를 알 수 있었습니다.

12. 관에서 개발한 주택지, 관사단지와 영단주택지
경성부윤(서울시) 뿐 아니라 동양척식회사 등 각종 공사 공기업의 임직원들을 위한 거주지, 관사는 기관의 위세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습니다.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왜 궁궐을 뜯어서 관사를 짓는 거냐고;;; 관사단지가 생기면 대중교통이 연결확장될 만큼 개발의 중심이고 요지였습니다.
일제 말기에는 또 뭐 공기업 설립해서 총력투쟁을 위한 산업역군 주거단지로 양산형 주택단지, 영단주택을 관의 이름으로 개발합니다. 참 가지가지한다... 영단주택은 말은 내선일치라고 하는데 10평 이상은 일본인, 그 이하는 조선인용으로 철저히 차별적인 거였고요... 문래동 등지에 아직도 꽤 남아있는데 보면 뭐 우리 주변의 낡은 재개발 직전의 주택과 거의 구분이 안 됩니다. 모던한 양산형 클래식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다 읽고 나니 참 흥미롭고도 유익했습니다. 그간 주변의 현상으로만 존재하던 것에 대해서 그 맥락과 이유를 알게 되니 직접적인 쓸모는 없어도 통찰을 기르기에 충분하군요. 아울러 대부분의 행정이라는 것이 일제 시대에서 개량되어 반복되어 왔다는 걸 생각해 볼 때, 부동산 정책을 이해하기에도 좋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부동산 개발과 대중의 집착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해 주고요.

유일한 불만이 있다면 전 평면도 덕후인데 이 책에 수록된 평면도들이 대부분 너무 작고 흐리게 되어 있어 그 실제의 용도나 구조를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과거의 흐릿한 자료의 한계가 있다면 수정 확대하여 이해를 도와주는 게 어땠을까(그리고 대학원생은 더 죽어났겠지)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의 생각을 해 봅니다.
-끝-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