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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운 떨어질 때마다 보고 힘을 얻는 가난 포르노(...) 소설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고 나머지 하나는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입니다. 뭐라고 딱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객관적으로는 정말 바닥의 바닥을 구르면서도 유머러스한 글을 읽으면 기분이 나아지더라구요. 전 객관적으로는 태어나면서부터 중산층이었습니다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난에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이 책은 조지 오웰의 첫 소설입니다. 저는 십대때 이 소설을 읽고 너무나 생생한 빈곤 묘사에 몸서리를 쳤죠. 그리고 조지 오웰이 식민지 공무원 자녀로 사립학교 다닌 인텔리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화자인 '나'도 인텔리 영국인으로 나옴) 이건 누구에게나 갑자기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특히 요즘 한국처럼 중산층 몰락이 급속도로 이루어질 때는.

조지 오웰과 화자의 차이라면...조지 오웰은 스스로 1928년부터 18개월 동안 밑바닥을 탐사한 거고, 화자인 '나'는 빠리에서 영어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갑자기 해고당하는데 일은 안 구해지면서 몇개월만에 접시닦이로 영락합니다. 그리고 영국에 돌아가서는 돈이 안 구해지자 노숙자가 됩니다. 여기서도 이튼 출신 젠트리라는 게 뼛속 깊이 느껴지는 게...친구한테 돈 빌려달란 소리가 안 나와서 노숙을 택합니다 어이구.

다음은 소설의 주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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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생활의 발견**

그때부터 나의 가난 경험이 시작되었다. 하루 6프랑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가난은 아니더라도 그 언저리 정도는 된다. 6프랑이면 1실링에 해당하는 데 방법만 알면 파리에서 하루 1실링으로 살아갈 수 있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은 가난의 독특한 비천함, 어쩔 수 없이 겪는 변화, 복잡스러운 째째함, 주눅들기 따위다.

이를테면 가난에 들러붙는 비밀주의를 발견한다. 어쩌다 갑자기 하루에 6프랑의 수입으로 줄어들었다. 빨랫감을 맡기던 세탁소에 발을 끊는데 그러면 세탁소 여자가 지나가는 당신을 보고 왜냐고 묻는다. 뭐라고 얼버무리면 그 여자는 다른 데에 맡긴다고 여기고 평생토록 당신과 원수가 진다. 담뱃가게 주인이 볼 때마다 왜 담배를 줄였느냐고 묻는다.

다음은 끼니 문제인데 끼니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를 발견한다. 빵과 마가린만을 먹고 밖에 나와 가게 유리창을 들여다본다. 낭비되듯 거대하게 쌓인 음식이 당신을 모욕한다. 그런 많은 음식을 보면 울먹거리는 자기연민이 몰아닥친다. 빵 한 덩이를 잡아채고 내달아 붙잡히기 전에 먹어치우자는 생각도 들지만 순전히 배짱이 없어서 자제한다.

가난과 뗄 수 없는 따분함을 발견한다. 아무런 일도 할 것이 없고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아무런 일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 때이다. 오직 음식만이 몸을 일으키게 한다. 사람이 빵과 마가린만 먹고 일주일이 지나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랄 수 없고 그저 장기 몇 개 달린 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파리의 접시닦이 생활**

접시닦이가 현대적인 세계에서 노예들 중에 하나라는 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같다. 그의 일은 노예적이고 기술이 없다. 그는 닦 살아 있을 만큼을 보수로 받는다. 이 순간에도 파리에는 학사학위를 가지고 하루 열시간에서 열다섯 시간 접시를 닦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게으르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으른 사람은 접시닦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일상의 덫에 걸려든 것이다.

그는 호텔이나 음식점의 노예이고 그의 노예생활은 무익하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큰 호텔과 고급 음식점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이것들은 사치를 제공한다고 여겨지지만 실제로 이것들은 사치의 값싸고 조악한 모조품을 제공할 뿐이다. 호텔과 음식점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지만 그것들이 수백명의 사람들을 노예화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본질적으로 '고급'호텔은 2백명이 정말로 원하지는 않는 것들에 대하여 바가지를 쓰도록 1백명이 악마처럼 고생하는 장소이다. 만일 이러한 넌센스가 호텔과 음식점에서 사라지고, 단순한 능률을 가지고 일이 행해진다면 접시닦이는 하루 열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이 아닌 여섯시간에서 여덟 시간을 일하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카토(로마의 정치가)는 노예는 자지 않을 때에는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예가 하는 일이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일 자체가 노예에게 좋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서는 아직도 잔존하고, 그런 정서가 산더미 같은 무익한 고역을 쌓아오고 있다.

나는 무익한 노동을 영속시키려는 이런 본능이 근본적으로는 대중에 대한 공포일 뿐이라고 믿는다. 대중은 너무 하등한 동물이어서 여가가 생기면 위험할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대중은 너무 바빠서 생각을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걸인의 사회적 지위**

걸인은 왜 경멸당하는가. 나는 걸인들이 웬만큼 생활비를 벌지 못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꼼꼼이 살펴보면 걸인의 생계비와 남부끄럽지 않은 무수한 사람들의 생계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걸인은 일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잡역부는 곡괭이를 휘두름으로써 일한다. 회계사는 숫자를 더함으로써 일한다. 걸인은 어떤 날씨에도 한데에서 서 있고 하지 정맥류와 만성기관지염 등에 걸림으로써 일한다. 이것도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직업이다. 물론 아주 무익한 직업이긴 하지만 그렇게 본다면 평판 좋은 많은 직업들도 아주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유형으로서도 걸인은 다른 수십가지 직업인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사람들이다. 걸인은 대부분의 특허 매약 판매 상인과 비교하여 정직하고, 일요신문 사주와 비교하여 고상하며, 집요한 할부 판매원과 비교하여 상냥하다. 간단히 말해서 걸인은 기생충이지만 상당히 무해한 기생충이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정도 이상을 사회로부터 뜯어내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로 일이 유익한가 무익한가, 생산적인가 기생적인가를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구되는 것은 그 일이 수익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뿐이다. 에너지, 능률, 사회복지사업 기타 등등 모든 현대적인 이야기에서 '돈을 벌고, 합법적으로 벌고, 많이 벌어라'하는 의미 말고 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돈은 미덕의 주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 기준에서 걸인은 낙제이고 이것 때문에 그들은 경멸당한다. 구걸을 해서 일주일에 10파운드라도 벌 수 있다면 걸인은 즉각 남부끄럽지 않은 직업이 될 것이다.

사실적으로 보아 걸인은 다른 비즈니스맨처럼 일이 들어오는 대로 생활비를 버는 비즈니스맨일 뿐이다. 걸인은 대부분의 현대인들과는 달리 명예를 팔지 않는다. 다만 그는 부자가 되는 것이 불가능한 직업을 선택하는 실수를 한 것뿐이다.

***부랑인에 관한 소견**

부랑인은 위험한 인물이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념을 살펴보자. 부랑자 구호소 한 곳이 보통 하룻밤에 백 명의 부랑인을 받는데 이들을 다루는 직원이 기껏해야 경비원 세 명이다. 무장도 하지 않는 세 사람이 무법자 백 명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유순하고도 기가 꺾인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부랑자 구호소와 부랑인의 하루 일상에 대해 이미 서술했지만 강조해 두어야 할 세가지 특별한 악폐가 있다. 첫째는 배고픔인데, 이것은 부랑인의 거의 일반적인 운명이다. 부랑자 구호소에서는 충분히 먹을 만큼 준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을 정도로 배급량을 주기 때문에 그 이외의 음식은 구걸을 함으로써 즉 법을 어김으로써 얻어야만 한다. 그 결과로 거의 모든 부랑인이 영양실조로 쇠약해져 있다.

부랑인 생활의 둘째로 큰 악폐는 여자와의 접촉이 완전히 단절된다는 것이다.

부랑인은 우선 그들과 같은 사회적 수준에 있는 여자들이 극히 드물기 때문에도 여자들과 단절된다. 사람들은 극빈자들 사이에도 남녀 성별이 다른 곳에서처럼 똑같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상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실제로 어떤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사회가 전적으로 남자들뿐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실직이 남자보다 여자에게 덜 영향을 미치거나 볼품 있는 여자라면 마지막 수단으로 어떤 남자에게 의탁할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결과로 남자 부랑인은 영속적인 독신 생활의 운명을 맞게 된다.

왜냐하면 부랑인이 자기와 같은 수준에 있는 여자를 찾을 수 없다면 수준이 자신보다 더 높은 여자들은 비록 아주 조금만 높다 하여도 달나라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논의할 가치가 없지만 여자가 자신보다 훨씬 더 가난한 남자에게 자신을 낮추는 일은 결코, 또는 거의 없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부랑인은 부랑하는 순간부터 독신자이다. 그는 아주 드물게 몇 실링를 모아서 매춘부를 상대하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아내나 애인 또는 어떠한 부류의 여자라도 얻을 만한 희망이 전혀 없다.

이것의 결과가 어떠할지 분명하다. 그것은 예를 들면 동성애와 가끔 벌어지는 강간 사건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결과는 자신이 아예 결혼에 적합한 대상으로 간주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남자에게서 작용하는 품격 하락이다. 성 충동은 더 고상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근본적인 충동이라고 할 수 있고 성적 굶주림은 거의 육체의 굶주림만큼 사기를 저하시킬 수 있다. 가난의 악폐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데 있다기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사람을 썩게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성적 굶주림이 이러한 썩어가는 과정에 기여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모든 부류의 여자들과 단절된 부랑인은 스스로 절름발이나 정신병자의 등급으로 하락했다고 여긴다. 이보다 더 남자의 자존심을 손상시키는 굴욕도 없을 것이다.

부랑인 생활의 나머지 큰 악폐는 강요된 게으름이다. 필요한 것은 그를 극빈하지 않게 하는 일인데, 이것은 오직 그에게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으로만 이뤄질 수 있다.

***에필로그**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내가 돈에 쪼들리면서 확실히 배워둔 한두 가지는 짚어낼 수 있다. 나는 두 번 다시 모든 부랑인이 불량배 주정꾼이라고 생각하지 않겠고, 내가 1페니를 주면 걸인이 고마워하리라 기대하지 않겠으며, 실직한 사람들이 기력이 없다고 해도 놀라지 않겠고, 구세군에게는 기부하지 않을 것이며, 옷가지를 전당 잡히지도 않겠으며, 광고 전단지를 거절하지도 않겠고, 고급 음식점의 식사를 즐기지도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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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인 의견은 가난은 암 같은 겁니다. 개인의 폭식이나 게으름, 무절제한 생활이 영향을 줄 수 있지만...대부분은 통제하지 못하는 무엇인가가 벼락같이 삶을 망치고, 대물림되죠.

평생을 가난에서 떨어져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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