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완벽한 아내 만들기-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이번 책 부제도 참 거창하군요...)
버림받은 루크레티아는 나름 한 재산 받아서 새로 견습생활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지만, 사브리나는 두 명이 하던 집안일을 고스란히 떠맡으면서도 영남이 요구하는 각종 학습을 따라가야 했으며, 영남의 파트너로서 사교계에서 사교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예쁘고 교양있는 사브리나를 사교계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모두다 알고 있으나 사브리나만 모르고 있던 사실-하녀로 키워지고 있지만 주인의 개념녀 테스트에 합격하면 마님이 될 예정으로 키워진다는 건 함구했습니다. 영남이 아무리 괴벽이 있어도 결국 영남은 자기들과 같은 계급의 사람으로 감싸줘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브리나가 자라면서 영남의 개념녀 테스트는 더 괴악해졌습니다. 인내심을 알아본다고 맨 어깨와 팔에 뜨거운 왁스를 떨어뜨리질 않나, 예고없이 발치에 총을 발사하지 않나, 수영을 못하는데 영국의 드러운 늪에 처넣질 않나, 말 공포증이 있는 애한테 말을 억지로 태우질 않나...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잔인했던 건 아주 예쁜 드레스를 사준 다음 사브리나 손수 찢고 태우게 시킨 거였습니다. 가만 있자, 동시대에 영국 해협 건너편에 사드라고 비슷한 SM플레이를 즐기던 귀족이 하나 있었을 겁니다.
이 모든 개념녀 테스트를 그러저럭 인내하면서 따라오던 사브리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면...9부 능선을 넘어 놓고 마지막 테스트에서 떨어져서 쫓겨났습니다. 영남이 입으라는 대로 옷을 안 입어서 그렇다는데, 이게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후에도 사브리나의 인생은 깁니다. 결혼하고, 애 둘 딸린 돈 없는 과부가 되었지만 기숙학교의 관리자 자리를 얻어서 평생 일하며 살다가 유복한 할머니로 죽었습니다.
아 영남요? 영남은 실망했지만 마침 좋은 집안에 교양있는 상속녀를 만났는데 줏대가 없는 건지 어쩐지 자기 말에 몸을 갈아 순종하는 여자라 만족하고 결혼해서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마누라가 자기가 바라는 이상에 못 따라온다고 계속 죄책감을 주입시켜가며 엄청 갈궈가며 살았습니다. 마누라는 그걸 또 좋다고 참아가며 따라갔으니 제 짝 지가 만났네여(...) 그리고 집 밖에서는 흑인 노예 인권 운동가였고,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아이들의 인성을 생각하는 베스트셀러 동화작가로 살았습니다. 이런 그의 진보적인 행보가 더욱더 그의 여성관의 빻음과 대치되어 보일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진보 개저 많잖습니까. 세상에는 별별 모순되는 행보의 사람들이 많지요. 찾아보면 자한당 지지하는 게이도 있을 거예요;;;
저는 이 영남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한 생태학 보고서 쯤으로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한국의 장삼이사를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현실의 여성에 불만족하고 멸시하다 이상의 여성을 숭배하는데 돈까지 많아서 머리가 훽 돌면 저런 일을 하게 되는구나 뭐 그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남이 진지하면 진지할 수록 웃기더라구요. 물론 '피그말리온'처럼 주체적으로 엿먹이는 사이다는 없다고 불만이 있을 만도 한데요, 이건 논픽션이잖아요. 현실은 고구마와 사이다의 중간 어드메에 있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사브리나는 영남이 신부수업으로 주입한 지식과 교양을 평생 커리어로 잘 써먹었으니 나름 엿먹이긴 한 셈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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