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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완벽한 아내 만들기-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 (이번 책 부제도 참 거창하군요...) 

저자 : 웬디 무어
출판사 : 글항아리
장르 : 논픽션(제목은 무슨 로설처럼 생겨먹어서 하드보일드 논픽션입니다)

옛날옛날 한 옛날,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기 직전인 18세기 중반에 젠트리 계급의 토머스 데이라는 영국남자(차후에는 제 편의를 위해 줄여서 영남이라고 하겠습니다)가 살았습니다. 이 영남은 조실부하고 모는 재혼을 해서 그 또래의 다른 영남들보다 부모의 보살핌을 덜 받은 모양입니다만 그게 앞으로 저지르는 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추정할 수는 있으나 정당화하기엔 한참 멀었습니다. 

이 영남은 공부 잘하고 유복한 젠트리가 그러듯이 좋은 대학에 갔습니다만, 거기서도 혼자만의 사색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사교와 단장을 경멸하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습니다. 멋을 모르고 사교 언어에 능하지 않아도 대충 입혀주는 거 입고 남들 하는 것만 들어도 영국 남자 평균은 갈 텐데(언제나 그렇듯이 옆집 프랑스에 비해서 영국의 비주얼 및 에티켓 허들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소질도 없고 본인도 싫어해서 매우 안습한 수준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영남은 매우 재산이 많고 집안도 괜찮아서 거기에 혹한 영애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가떨어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영남이 눈이 낮냐...아니오, 이 영남은 자신의 아내감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순진한 시골 처녀일 것(아 물론 물리적 순결성은 디폴트구여;;;)
-자신과 함께 고행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체력적으로 스파르타 여인럼 강인할 것(하녀 없이 집안일을 다 해야 합니다)
-세상을 멀리한 채 검소하게 생활할 것(이 양반 하는 거 보면 한 세기 뒤의 월든 뺨칩니다)
-자신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로 지적이되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할 것

이런 덕성을 중요시한다는 건 그가 속한 젠트리 계급의 아가씨들이 그런 특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씹는 행동과 궤를 같이 합니다. 실제로 이 영남은 영애들이 허영에만 들뜨고 사치스럽고 지적인 면은 떨어지며 남자를 좌지우지하려 든다고 생각했거든요(이거 어디서 본 거 같지 않나요?) 김치녀에게 진저리를 내고 베트남에서 처녀 면접을 보는 한남처럼, 이 영남은 아주 다른 곳에서 신부감을 찾고자 합니다. 그런 덕성을 가진 여자가 없으면 자기가 키우면 되는 거죠. 

아...제일 중요한 게 빠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연히 예쁜 건 기본 사양이죠. 그건 이 영남이 완벽한 아내 프로젝트를 위해 스물한살의 나이에 고아원에서 열두살, 열한살 여자애들 둘 고를 때 참하게 이쁜 애, 생기발랄하게 이쁜 애 골랐으니 이미 빼도박도 못한 진실입니다. 걔들 고를 때 뭐 구술 시험을 쳤겠어요, 덕성 시험을 쳤겠어요...걍 이쁜 애들 골라서 자기가 가르쳐서 빚어내면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나 18세기의 영국에서 온갖 인권유린과 별별 괴이한 일들이 있다쳐도 스물한살의 독신남이 1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 둘을 입양도 아니고 이건 잉첩(같은 시대에 지구 반대편 중국에서는 귀족 나리가 어린 나이의 여자애들을 하녀로 부리다가 첩으로 들이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으로 들이는 건데 제도적, 사회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죠. 이 어려운 일을 알탕연대...아니 젠트리간의 우정으로 해냅니다. 유부남인 친구 이름을 빌려서 그 집에 하녀견습하러 간다고 절차 다 밟아놓고 그때부터 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주경야독을 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년이 지나고 그 중에 생기발랄하게 이쁜 애(하필이면 지어준 이름도 루크레티아...열녀를 만들고 싶었나;;;)가 지적인 면에서 잘 못 따라온다고 떨어뜨리고 참하게 이쁜 사브리나 하나만 자신의 고독한 아내 레이스에 남겨놓게 됩니다.       

버림받은 루크레티아는 나름 한 재산 받아서 새로 견습생활을 시작하면 될 일이었지만, 사브리나는 두 명이 하던 집안일을 고스란히 떠맡으면서도 영남이 요구하는 각종 학습을 따라가야 했으며, 영남의 파트너로서 사교계에서 사교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예쁘고 교양있는 사브리나를 사교계 사람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모두다 알고 있으나 사브리나만 모르고 있던 사실-하녀로 키워지고 있지만 주인의 개념녀 테스트에 합격하면 마님이 될 예정으로 키워진다는 건 함구했습니다. 영남이 아무리 괴벽이 있어도 결국 영남은 자기들과 같은 계급의 사람으로 감싸줘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브리나가 자라면서 영남의 개념녀 테스트는 더 괴악해졌습니다. 인내심을 알아본다고 맨 어깨와 팔에 뜨거운 왁스를 떨어뜨리질 않나, 예고없이 발치에 총을 발사하지 않나, 수영을 못하는데 영국의 드러운 늪에 처넣질 않나, 말 공포증이 있는 애한테 말을 억지로 태우질 않나...그래도 그 중에서 제일 잔인했던 건 아주 예쁜 드레스를 사준 다음 사브리나 손수 찢고 태우게 시킨 거였습니다. 가만 있자, 동시대에 영국 해협 건너편에 사드라고 비슷한 SM플레이를 즐기던 귀족이 하나 있었을 겁니다.

이 모든 개념녀 테스트를 그러저럭 인내하면서 따라오던 사브리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냐면...9부 능선을 넘어 놓고 마지막 테스트에서 떨어져서 쫓겨났습니다. 영남이 입으라는 대로 옷을 안 입어서 그렇다는데, 이게 고의였는지 아닌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후에도 사브리나의 인생은 깁니다. 결혼하고, 애 둘 딸린 돈 없는 과부가 되었지만 기숙학교의 관리자 자리를 얻어서 평생 일하며 살다가 유복한 할머니로 죽었습니다.

아 영남요? 영남은 실망했지만 마침 좋은 집안에 교양있는 상속녀를 만났는데 줏대가 없는 건지 어쩐지 자기 말에 몸을 갈아 순종하는 여자라 만족하고 결혼해서 원하는 대로 하지 않아도 될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마누라가 자기가 바라는 이상에 못 따라온다고 계속 죄책감을 주입시켜가며 엄청 갈궈가며 살았습니다. 마누라는 그걸 또 좋다고 참아가며 따라갔으니 제 짝 지가 만났네여(...) 그리고 집 밖에서는 흑인 노예 인권 운동가였고,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고, 아이들의 인성을 생각하는 베스트셀러 동화작가로 살았습니다. 이런 그의 진보적인 행보가 더욱더 그의 여성관의 빻음과 대치되어 보일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도 진보 개저 많잖습니까. 세상에는 별별 모순되는 행보의 사람들이 많지요. 찾아보면 자한당 지지하는 게이도 있을 거예요;;;

저는 이 영남의 이야기를 아주 흥미진진한 생태학 보고서 쯤으로 읽었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한국의 장삼이사를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현실의 여성에 불만족하고 멸시하다 이상의 여성을 숭배하는데 돈까지 많아서 머리가 훽 돌면 저런 일을 하게 되는구나 뭐 그 정도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영남이 진지하면 진지할 수록 웃기더라구요. 물론 '피그말리온'처럼 주체적으로 엿먹이는 사이다는 없다고 불만이 있을 만도 한데요, 이건 논픽션이잖아요. 현실은 고구마와 사이다의 중간 어드메에 있기 마련입니다. 거기다 사브리나는 영남이 신부수업으로 주입한 지식과 교양을 평생 커리어로 잘 써먹었으니 나름 엿먹이긴 한 셈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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