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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한인 브로커는 전화를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게 맞냐고, 차 상태가 저 정도인데 정말 멀쩡한 게 맞냐고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안부를 묻고는 차는 역시나 완파이므로 폐차 처리가 적당해 보이며 차 안에서 몇가지 잡동사니를 찾아왔다고 했다. 역시나 견인장 누군가가 GARMIN 네비(갤럭시 S2 정도 크기의 네비게이션인데, 매우 구리다. 한국에서는 자기 스마트폰으로 티맵을 켤 지언정 저 물건을 130불 돈을 주고 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를 들고 튄 것 같...지만 살아있는 게 어딘가.

 

마침 당시 동거인 언니는 다른 연수생과 플로리다에 놀러간 상태였다(같이 놀러가자고 했는데 수업 나가고 골프 연습이나 하자 싶어서 거절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갈 걸 그랬다) 경찰이 길바닥에서 집에 데려다주마 했는데 도저히 빽차를 타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서; 거절하고 당시 동승자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다른 연수생 모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가족이 오기 전이라 한가했던 그는 바로 현장에 와서는 각각의 집에다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내게 전화를 해서 사고 사실에 대해서 회사는 물론 다른 연수생에게도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진의에 대해서는 선의로 또는 악의로 해석할 여지가 꽤 있다. 굳이 그 일의 시효가 다 지나고 같이 다니던 회사를 퇴사한 후에 진의에 대해서 굳이 궁금해하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의 말에 그러네요 오빠, 하고 동의를 했다는 것이며 25명의 유학생 동료들의 머리와 경험을 빌릴 기회(그 중에는 잘나가는 로펌의 변호사도 있었다) 없이 혼자 힘으로 대응해 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슨 일이든 혼자 힘으로 꾸역꾸역 책임을 지려 한다는 평판에 대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런 케이스처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는 법이다.(아 그리고 이젠 늘거서 고쳐지지도 않네여 독거가 좀 그래여)

 

이후 사후관리는 크게 세 가지 이슈로 나뉘어진다.

 

(1)경찰에 대형 교통사고 가해자 후보 1번으로서 중과실이 없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

(2)영세 한인 보험회사에 완파된 내 차에 대한 부담금 납부 후 손해액을 보상받는 것

(3)동 보험회사에 줄줄이 접수될 다섯 차 및 운전자, 동승자의 인적, 물적 피해액을 보상하는 것

 

(1)번은 철저히 이메일을 통한 서면 조사로 진행되었다. 물론 이 동네가 그런 행정절차가 기본이어서도 있겠지만, 문해력 및 작문>>말하기인 내 입장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다른 피해자들의 진술을 확인하고 정정하며 내 입장을 밝히는 일이라 미묘한 영어의 뉘앙스를 감안해서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고, 어느 정도까지 정정해야 할 것인가는 좀 골치아픈 일이었다. 언제나 하는 말인지만 나는 의심이 많은지라; 상대방이 우다다다 쏟아내오는 말에 대해서 네네 맞습니다 했다간 *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가장 큰 이슈는 내가 주장하는 런어웨이 가해자에 대해서 목격자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두번째로 내가 사고 당시 핸들을 얼마나 꺾었는지-그러니까 과잉 방위를 하지 않았는지 하는 것이었다. 두번째에 대해서는 하도 여러번 설명하다 보니 이제는 내가 실제로 핸들을 꺾고 거짓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2)는 자 부담금 1,000불을 납부하고 손해액을 보상받으면 되는 문제라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소유주와 임차인이 죄다 구라라는 문제가 있긴 했지만 뭐 안 되면 내 돈 없어진 셈 치지 뭐. 예의 브로커가 며칠 만에 똑같은 차종을 리스해주었다. 다른 차를 타고 싶었지만 타 연수생에게 차가 바뀌었다는 정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좁은 사회답게 상대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다) 같은 차로 했더니...흰색 코롤라만 봐도 치가 떨린다.

 

(3)이 가장 손이 많이 가고 성가신 일이었다. 미국은 정말 더럽게 행정절차가 느리고 중요 서류가 등기도 아닌 일반우편으로 뭔가가 랜덤으로 날아오기 때문에(신용카드를 신청했는데 6개월 뒤에 떠날 때까지 받지 못했고, 나중에 우편함에 일반 우편으로 꽂혀 있더라는 얘기는 1년 전 선배 유학생의 얘기였다) 나는 우편함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며 다섯 개 보험회사의 다섯 가지 청구에 대해 계속 읽고 대응해야 했다. 다행히 같은 한인 교회의 교포 아가씨가 다른 한인 보험회사에 다녀서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었으며, 역시나 같은 업계의 약혼자에게서 대응 전략에 대해서도 알아봐주었다. 그러나 조언은 조언이고 할 일은 많아서...collision(충돌), policy(보험 약관), coverage(보상 범위), premium(보험 납입액), under-insured(보장 금액 부족) 등등의 자동차 사고 용어 및 보험 영어만 일취월장하는 세월이었다.

 

사건은 느리게 진행되고, 2월 중순부터 6월 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학교를 다니고, 여행을 다니고, 사람을 만나면서 일을 처리해나갔다. 가끔 장거리 여행을 떠나서 사고 관련 이메일에 회답하고 보험회사 전화를 받을 때마다 빚쟁이처럼 현실이 목을 조르는 걸 느꼈다. 마침 내가 스물다섯명 같은 유학생들에게 숙제를 해서 돌리는 숙제봇이었는데, 그 중의 한 명은 내가 새벽 시간에 숙제 이메일을 돌리는 걸 보고 마음 아팠다고 얘기했다.

 

...사고 처리 이메일보다는 숙제가 훨씬 낫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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