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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백은 터졌고, 차문은 완전히 찌그러져 있어서 나오기도 쉽지 않았다. 출동한 경찰이 차 문을 열어주어 나오자 차 네 대가 완파되어 있으며, 끄트머리의 프리우스 한 대는 찰과상 정도를 입은 게 눈에 들어왔으며 멕시칸 계열의 한 남자는 이미 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 특히 한국 대도시에 도처에 있는 CCTV가 빅브라더 어쩌구로 통하기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그만한 게 없다. 꽤 중심 사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거리 CCTV도 없고, 다들 운전하느라 보도에 보행자도 없는 상황에서 문제의 가해자는 이미 튀어버렸고, 결국 남은 팩트는 흰색 코롤라가 갑자기 1차선에서 미쳐 날아올라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유턴을 해서 반대 차선의 차 다섯대를 줄줄이 받아버렸다는 것 밖에 없다. 다행히 나와 동승자는 얼떨떨한 것 빼고는 다친 데가 하나도 없었으므로(나중에 집에 도착해서 보니 얼굴에 생채기가 좀 생겼다) 앰뷸런스는 도움이 필요한 다른 운전자들에게 갔고, 출동한 경찰에게 띄엄띄엄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시의 80~90년대 영어교육은 문법에 치중한 것이었으며, 심지어 선생들의 발음은 일본식+그 지역 사투리에 기반한 것이라 들어줄 만한 게 못 되었다. 또 모종의 이유로(...) 사교육을 받을 상황이 아니었던 나는 문법독해봇으로는 영어 최상위권이었고, 회계사 1차 시험에 영어가 있긴 했으나 또 그게 토플 베이스로 한 객관식이라 ㅋ 실제 생활 영어하고는 거리가 있다. 구 직장에 들어온 후로 우와 서울의 외고 나온 애들은 영어로 프리젠테이션이 되는구나 싶긴 했으나 이력상 국제 부서에 갈 일은 없었으므로 토익 토플 따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미국 연수 관련해서도 가장 긴장했을 때는 미대사관에 비자 인터뷰 갔을 때였고(워낙 막 대하셔서들;) 입국 인터뷰야 설마 돈 쓰러 온 사람한테 막 대하겠어 싶었고 나머지야 미국 집에 인터넷 계약하거나 가스 연결하고 학생증 만들고 골프장 부킹하는 행정 실무였는데 갑자기 가해자 1순위 후보가 되어 영어로 '내가 안 그랬어여'를 설명해야 하는 고난이도의 상황에 맞부닥치게 된 것이다-_-

 

다행히 경찰은 그다지 고압적으로 대하진 않았다. 여권과 학생 정보를 고스란히 알아간 다음 추가 조사를 통해 성실히 대응할 것을 당부한 후 물러갔다. 이제 남은 것은 각자 보험회사에 연락해서 차를 치우고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이었는데, 마침 내 차는 sub-lease였다. 뭔 얘기냐면, 돈만 있으면 외국인에게 그다지 뒷통수를 후려갈기진 않는 한국에 비해 미국은 특히 단기 유학생에 대해 '뭘 믿고 네놈에게 신용등급을 주냐'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은행계좌나 신용카드 거래실적, 직장이 없는 외국인은 자동차 리스 가격조차도 매우 비싸다. 이런 틈새 시장을 이용해서 현지 한인 브로커가 차를 대거 리스한 후 필요한 단기 유학생에게 bid-ask spread를 먹고 다시 리스해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고, 나도 그 서비스를 이용 중이었다. 고로 내 차는 정체불명의 다른 한인이 소유하고 있었고, 또 쌩판 남남인 한인2세가 리스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뭐 하나 야매가 아닌 게 없다. 평소야 별 문제 없지만 소유주와 임차인이 중요한 이 시점에선 매우 골치아파진다.

 

현지 한인 브로커는 잠시 당황하더니 침착해져서는 견인장(이미 누더기가 된 차는 견인되어 가 있었다) 주소를 불러받고 다음날 자신이 상태를 확인해 볼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 야매 과정으로; 가입한 한인 계열 손해보험 회사에는 내가 직접 연락해서 대응하라고 말했다. 그 회사는 장점: 한국어 ARS 서비스가 가능하다, 단점: 영세하다라는 특징을 가진 곳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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