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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 사골을 우려봅시다...

하도 이걸 우려먹다 보니 '이년은 회사에서 지 발로 나간 거 말고 인생에 뭐 내세울 게 없나'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뭐...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알 게 뭐야...

저는 회사를 나가고 나서 좀 살만해졌다 싶을 때, 2018년 여름 쯤 회사-대학 동문 여자 후배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때 '내가 뭘 안 해도 오래 있어주는 게 당신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그걸 못 해줘서 미안하다'라고 하자 그분들은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직장생활 1n년 한 30대 극후반 분들이 우는 걸 보자니 울린 사람으로 마음이 좀 그랬습니다(근데 난 안 울었음-_- 울면 눈화장 번짐-_-)

저는 그 회사에서 1n년을 재직했는데요, 처음 들어갈 때는 지금과 좀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90년대 초반에 처음 뽑은 대졸 공채 여성분들이 있긴 했는데(밀레니엄 전에는 '여직원'이라는 전문대-여상을 졸업한 별도 직군 여성 직원만 있었습니다. 승진은 물론 안 됐고 급여 체계도 완전히 달랐죠.) 여러가지 이유로 거의 다 퇴직해서 손에 꼽을 만큼이었고, 90년대 극 말부터 좀 있긴 했는데 경기가 경기인지라 남녀 공히 워낙 숫자가 적어서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였어요. 그런데 지금은(...이라고 해봤자 나간 다음에는 잘 모르지만) 어떻게든 1/3이라는 참으로 신기한 쿼터를 채워서 일단 절대적인 숫자도 많아졌죠.

제가 그 회사 들어가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여기는 여자들에게 정말 좋은 직장'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썩어가는 표정을 관리하느라 참 표리부동을 많이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임신-출산-육아에 대해서 시혜적인 배려를 해 준다는 의미에서는 한국에서 겁나 올려치기를 해 줄 만합니다...만 저는 해당사항 없고 그래도 다른 분들한테는 정말 좋은 조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여직원에 대해 별도 직군으로 관리하고, 별도 관리를 풀어도 모든 승진과 진급에서 누락시키는 직장에 비하자면 어쨌든 승진도 시켜주잖습니까. 물론 군대 기간이 2년 미만이 된지가 언젠데 군경력 감안한답시고 승진이 3년 이상 차이 나고, 미필인 남자는 미필 여자보다 어떻게든 빨리 시켜주긴 합니다만...낙태죄도 2019년에 헌법불합치가 된 이 대한민국에서... 뭐 생각해 보니 선녀같네요. 나와보니...껄껄...

여튼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이제서야;) 한국 여성 직장인은 첫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직하고 싶을 때 본인이 가지고 있는 '장기 근속 기득권'을 신중히 저울질해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해보자면 그래요. 몇몇 전문직이나 증권, IT 등 몇가지 직종을 제외하고는 대한민국 회사는 대부분 장기 근속에 대한 기득권이 있습니다. 다만 직종에 따라 그 기득권의 농도가 차이가 있을 뿐이죠. 경력직을 뽑을 때는 정말 그 자리에 경력직이 필요할 때 뿐이고, 쓸 때도 그 사람의 회사내 승진 등 커리어 패스를 그리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의 경우 특히 더 그러합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노골적으로 여성을 승진에서 배제하고(다시 한번 말하지만 군경력 제외하고 1~2년은 디폴트로 봐야 합니다, 그게 맞다는 게 아니라 비일비재하다는 겁니다), 고과와 성과급에서 대놓고 최하위를 때리지 않는 이상 버티면 본인은 올라갑니다. 그리고 한국의 회사 대부분은 연공서열에 따라 어떻게든 연봉이 올라갑니다. 심지어 연봉제를 표방하는 곳도 실질을 따지자면 그러합니다.

여러모로 눈꼴시려운데 어떻게 버티냐고요? 여러분이 존버해서 연공서열이 높아지면 '여성으로서의 귀여움'을 상실할 때쯤 하대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남자 후배들이 시건방지고 남자 상사랑 다르게 취급한다 해도 후배들에게 대하는 멸시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물론 욱하는 포인트가 없어진다는 말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평생에 단 한번 올까말까 한 얘긴데, 아마 현재 흐름을 보자면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옛날 한 옛날, 우리나라대통령도이제여자분이신데 초기에 기업은행에서 권순주 리스크부행장이 행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파격적인 얘기냐면요, 기업은행의 남초 문화는 일반은행보다 훨씬 더합니다. 부장급에서 여성은 한정적인 '여성적' 업무 말고는 없다시피 했어요. 리스크부행장(한국에서 리스크부행장은 부행장 중 제일 서열배분이 낮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한국 은행 리스크관리가 그렇게 그지같죠)도 파격이었는데 그 막내 서열에 제일 어린 리스크부행장을 행장을 시키다니, 전대미문의 인사예요. 네, 물론 여성 대통령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인사죠. 하지만 부행장급에 한 명이라도 여성이 있었길래 그게 가능했던 거예요. 구회사는 본점에 꼴랑 부팀장급이 최상위 여성 직위라 그 보여주기도 못했습니다...쯧쯧...요즘은 머가리가 좀 돌아가는지 임원급을 하나 만들긴 했는데 너무 티가 나서...;;;

아, 너무 나간 예죠? 그러면 강경화씨가 외무부 장관이 된 후를 생각해 봅시다. 원래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담당 과장(공무원 과장은 매애애우 높습니다) 일명 '주요 4 과장'은 언제나 남성이었습니다. 그런데 2019년 하반기 인사에 이 넷이 다 여성이었어요. 역차별이다, 보여주기냐 해도 일반적인, 합리적 보수적 속도로는 우리가 생각하는 변화를 우리 생에서는 결코 이뤄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장이 바뀌거나, 오너가 혁신하거나, 혹은 제도가 강제해야 기회가 옵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왔을 때, 가늘고 길게 평판관리를 하면서 존버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치사하고 더러워도 나의 장기근속 기득권의 농도는 얼마나 짙은가를 바깥세상과 신중히 저울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깥세상은 추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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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니년은 왜...라면 관짝 웨이팅이었다고 몇번 말했어요...진짜 죽는 줄 알았다니까...(후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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