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존재

마르케스의 '동유럽 기행'-방구석에서 1950년대 공산 동독 체코 폴란드 소련 헝가리 시간여행

키엘97 2022. 10. 31.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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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행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은이)
송병선 (옮긴이)
민음사 / 국내 출간일(2022-05-31)
원제 : De viaje por europa del este (1983년)
https://books.google.co.kr/books/about/%EB%8F%99%EC%9C%A0%EB%9F%BD_%EA%B8%B0%ED%96%89.html?id=Rcl6EAAAQBAJ&printsec=frontcover&source=kp_read_button&hl=ko&redir_esc=y#v=onepage&q&f=false

동유럽 기행

소설가, 저널리스트이자 남미 최고의 풍자가 마르케스가 솔직 담백 유쾌하게 담아낸 촌철살인과 요절복통의 사회주의 여행기

books.google.co.jp

(구글 북스에서 첫 부분 미리 읽기 가능합니다 앞 부분은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특히 이 책의 제일 첫 부분
‘철의 장막’은 장막도 아니고 철로 돼 있지도 않다. 그것은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한 나무 방책인데, 꼭 이발소 간판 같다. 그 장막 안에 석 달 동안 머무르고서, 나는 철의 장막이 정말로 철의 장막이기를 바라는 건 일반 상식이 모자란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이 부분은 비소설 부분 인상적인 오프닝의 예로 넣을 정도로 뛰어납니다.)
제가 팔로우하고 있던 민음사 트위터에서 이 책 출간 직전에 영업하길래 벼르고 있다가 7월말에 샀습니다. 그 동안 아껴서 읽다가 본격으로 진심이 된 건 역시나 발목 다치고 병원/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병상은 남의 여행기를 읽기에 매우 적당한 때입니다. 특히 옛날 여행기면 역사와 여행 두 가지를 잡을 수가 있죠.

이 책은 1950년대, 동유럽이 공산화된지 불과 10년여 되었을 무렵, 아직 청년이었고 사회주의에 경도된 콜롬비아의 호기심 많은 청년 마르케스가 서유럽에 왔다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청년들과 작당하고(중고차를 산 후 뭐할까 하다가 아침 열시에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술김에 저지른 거 같습니다. 아침 열 시면 술 마시기에 적당한 땐 아닙니다만 전날 마신 술이 덜 깼다거나;;;)아직 허술하던 철의 장막을 뚫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넘어가서 체코, 폴란드, 우크라이나, 드디어 소련, 그리고 헝가리를 석 달 동안 두루 유람한 얘깁니다.

장거리 여행이 그렇습니다만 제일 첫 부분이 가장 인상깊고 긴 편이죠. 사실 동독은 당시 동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편이긴 했지만 미국의 원조를 받고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던 서독을 건너온 이들 청년들이 보기엔 동독의 무기력함과 투박함, 비효율성은 놀라울 정도로 대비 효과가 생생합니다.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동독은 공산 위성 국가의 전형성을 띈 묘사입니다. 다른 나라-체코의 교활할 정도로 역동적인 공업 발전, 영락한 폴란드의 교양과 자존심, 그리고 공산주의 치세에조차 노동자와 거리를 두는 귀족에 대한 묘사, 그리고 막 소련에 짓밟힌 헝가리의 무시무시한 공포 분위기는 각 나라의 독특함을 잘 보여줘요. 그리고 화자인 마르케스가 제 3세계에서 와서 중반까지 함께 한 서유럽 친구들과는 또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또한 별미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습니다. 마르케스는 참 글을 맛깔스럽게 써요. 문제는 소설에서는 너무 냉혹하게 잘 써서(으앙;;; 이 아저씨 너무 무섭게 잘 써요;ㅁ;) 덜덜 떨면서 읽는데 이건 이미 역사가 스포한 과거의 일이고, 마르케스가 제 3자의 눈으로 봐서 또 안심할 수도 있고...알고 보니까 이 아저씨가 사람에 대해서 호기심이 굉장하고 애정이 많은 사람이더라구요. 그래서 동유럽에서도 각종 통제와 감시를 뚫고 일반 사람들을 만나서 온갖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을 던져댑니다. 그걸 또 받아내는 사람들도 보통은 아님...(특히 소련에서 고 스탈린을 현란하게 까던 여성 지식인은 정말 돌았;;;)

묘한 얘기지만 마르케스가 사람에 대해 가진 애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은 철의 장막 저편에서는 악의 끝판왕쯤 되는 소련에서입니다. 소련 각지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 나타내는 순수한 호의와 호기심을 꼬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요. (아 물론 그 와중에도 소련의 관료주의와 중공업>>>>>경공업 불균형 등등은 신랄하게 까고 있음;) 하긴 저도 어쩌다 보니 그 구 소련 사람들의 놀라울 정도로 순수하고 열렬한 애정을 경험해 봐서 좀 이해가 갑니다.

여러 번 얘기하지만 정말 재미있습니다. 두고 두고 읽고 싶은 책이에요. 일독을 권할 대상은 80~90년대 중반까지 역전의 사회 운동 용자 학번들. 임수경씨의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기억하는 세대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덧. 하지만 민음사는 좋은 아이템을 따 내는 건 잘 하는데 구현하는 덴 뭔가 자잘한 약점(어쩔 땐 큰 흠)이 참 많습니다. 특히나 흐루시초프같은 양반은 진짜 네임드인데 같은 장 내에서도 그 이름 표기가 왔다갔다 하면 어쩌라고;;; 아참, 이제 검색해 보니께 흐루쇼프가 현지 발음이고 흐루시초프는 일본 영향을 받은 거라네요. 실로폰이 글로켄슈필로, 요오드가 아이오딘이 되는 시대니 뭐...
세월은 계속 흘러가고 있고, 저는 계속 후져지고 있습니다. 계속 업뎃을 해야겠어요(이상한 결론)